‘일장기 반도체’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도쿄=허문명 기자 2023. 4. 3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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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을 가다②]

● 내셔널리즘이 만든 ‘원스어게인’
● 日 반도체 미래 ‘부정론 vs 긍정론’
● “차량용·산업용 반도체 집중해야”
● 선택과 집중의 韓, 종합 치중한 日
● 美 상대로 강한 레버리지 가진 韓
● 대만해협, 세계서 가장 뜨거운 지역
● 韓日, 미들 파워 국가의 정체성
● 삼성의 성취,일본인은 부러워한다

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미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 산업 질서를 재구축하고 게임의 룰(rule)을 바꾸려 한다. 동맹국에 보조금 당근을 내밀며 기술과 이익 공유까지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은 1980년대 반도체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으로 외국기업 공장을 유치하고 무엇보다 미국·대만과 똘똘 뭉쳐 협업 체계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과연 그들만큼 절박하게 뛰고 있는가. 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의 목소리를 전문가 인터뷰를 중심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美·대만과 뭉쳐야 산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② 원스어게인? '일장기 반도체'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③ 영원한 1등은 없다, 日 반도체 추락사(史)가 주는 교훈
④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반도체 부활을 꿈꾸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정작 현지 시장과 미디어의 반응은 냉정하다 못해 차가웠다. 무엇보다 산업이 발전하려면 민간의 자발적 의지와 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정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데 대해 회의적 시선이 많았다. 특히 2나노 이하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해 한국과 대만을 따라잡겠다는 목표에 대해 "5년 내 가능할지는 미지수"(요미우리신문), "국민 세금으로 보조금만 퍼붓는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아사히신문) 등 비판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기술도 사람도 없는 일본

도쿄에서 만난 오야마 사토시 씨는 부정적 견해를 가진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로스버그라는 컨설턴트 회사 대표인 그는 게이오대에서 소프트웨어를 전공하고 도쿄 일렉트로닉 반도체 장비 회사에 입사해 반도체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 1992년에 가트너(분석회사) 반도체 애널리스트가 돼 영국 증권회사 바클레이즈, 아무르 증권(네덜란드 증권회사), 후지쓰에서 일하다 2017년 지금의 회사를 설립하고 현재 반도체 관련 회사들의 컨설팅 업무를 맡고 있다.

일본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 대한 오야마 씨의 의견은 한마디로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미 10년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2나노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는 회사인 라피더스를 만들겠다고 밝혔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파격적이라서요?

"아니오. 그 반대입니다. 성공하려면 여러 난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전문가이자 컨설턴트 회사 그로스버그의 대표인 오야마 사토시 씨. [도쿄=허문명 기자]
그는 조목조목 이유를 댔다.

"첫째, 반도체 인재들이 다 사라졌는데 어디서 구할 것인가, 설사 2나노 같은 최첨단 제품을 만들 수 있다 해도 수익을 올릴 수 있겠는가, 또 칩을 만든다 해도 어디에 쓸 것인지, 한마디로 애플리케이션을 어디에 쓸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반도체를 만들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어디에 쓰기 위해 만드는 것이냐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엔진을 제어하기 위해 쓸 것인지, 신형 스마트폰에 넣을 것인지 등 쓰임에 대해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자의 다종다양한 요구는 무엇일까,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려면 어떤 기능을 가진 칩을 사용하면 좋을까, 이런 질문을 통해 소비자의 숨은 요구를 깨닫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한데 라피더스는 2나노에만 도전한다고 할 뿐 어디에 쓸 칩을 만들지가 확실치 않습니다."

라피더스가 도요타, NEC 등 일본 최고 회사 8곳이 만든 드림팀이라고는 하지만, 여러 회사가 연합하다보니 의사결정과정의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전문 경영인이 맡아 할 것이므로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또 개별 회사마다 투자금이 많아야 한국 돈으로 100억 원(7개사), 30억 원(1개사) 정도여서 실패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반도체 공장 하나 지으려면 10조 원이나 15조 원 정도가 들어가죠. 개별 민간 기업 처지에서는 리스크(risk)를 크게 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그만큼 미래 반도체산업에 대한 절박감이 크지 않다는 이야기도 되지요.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시바든 소니든 개별 민간 기업이 나서지 않는 한 어렵습니다. 라피더스 히가시 회장과 고이케 사장을 만나 미래가 밝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수는 없다. 어렵더라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전망을 너무 어둡게 보네요.

"거듭 말하지만 민간 기업들이 나서야 하는데 그럴 생각도, 의지도, 절박감도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구마모토에 TSMC가 공장을 지어서 분위기가 조금은 업(up)돼 보이는데요.

"그건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구마모토는 미국 반도체의 심장인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처럼 될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TSMC 진출이 일본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수준까지 가는 건 아닙니다. 히로시마에 있는 미국 마이크론 공장과 비슷한 거지요."

그렇다면 일본 반도체의 살길은 뭔가요.

"저도 남들이 듣기 좋은 이상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일본이 메모리 반도체나 첨단 로직 반도체에 도전하는 건 거듭 말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일본이 따라잡기 힘든 영역에 뛰어들기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봐요. 예를 들어 차량용이나 산업용 반도체에 집중하는 겁니다. 차량용 반도체의 경우 파워 반도체는 자동차 산업 대국인 일본이 잘하고 있고 잘 할 수 있어서 경쟁력이 있습니다."

파워 반도체라고 한다면?

"쉽게 말해 막노동을 담당하는 반도체입니다. 전압이 높은 전류를 전자기기에 힘차게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죠. 연산을 하는 로직 반도체, 기억을 담당하는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제3의 반도체 분야입니다. 앞으로 전기자동차 시대가 되면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겁니다. 일본의 경우 반도체 강국의 지위는 한국과 대만에 내주었지만 자동차는 여전히 세계 최고 아닙니까. 일본에 차량용 반도체 칩 수요가 많다는 것이 파워 반도체 업체에는 유리한 여건이죠. 현재 미쓰비시 전기, 후지 전기, 도시바,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 롬 등이 건투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조 엔(28조6000억 원) 미만이던 차량용 반도체 세계 시장 규모는 2030년 4조 엔(38조2000억 원)이 될 것이란 전망도 있습니다. 저는 최첨단 나노 경쟁보다는 이런 분야가 일본 반도체 산업 재건의 기둥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본 반도체 사업은 소니의 이미지 센서(CMOS) 기술처럼 전문화돼야 한다고 봅니다. 전기 자동차가 보급되고 반도체 칩이 물건을 제어하는 분야가 넓어질수록 전략 물자로서 파워 반도체 가치는 높아질 겁니다. 잘하고 있는 걸 살려야지요. 무리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차량용이나 산업용은 반도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금액 기준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차량용은 9%, 산업용은 11% 정도지요. 하지만 계속 수요가 늘어날 겁니다."

반도체 잘 만드는 미국·한국·대만과 친해야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일본 메모리 반도체 회사들은 왜 망했을까요.

"한마디로 느슨한 경영 판단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반도체를 만드는 히타치 등 종합 기업이 너무 많았습니다. 리소스(자원)가 분산된 거죠. 한국에서는 LG와 현대가 하이닉스로 합쳐지는 등 구조조정이 일어나면서 선택과 집중이 가능했잖아요. 일본 반도체 최후의 보루였던 엘피다는 일본 정부가 손을 떼서 망하게 됐습니다. 사실 6개월만 버티면 살아날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여기에 스마트폰형 반도체 개발이 6개월 정도 늦은 것도 큰 원인이었습니다. 또 외부적으로는 1달러 70엔이던 엄청난 엔고(高)도 문제였고요."

흔히 한국의 오너십과 일본의 전문경영인 체제가 성패를 갈랐다고도 하던데요.

"엘피다의 사카모토 사장은 한국식으로 톱다운(하향식) 결정을 내릴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피디(speedy)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나마 사카모토 사장이었기에 그 정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정부 회사이다 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회사들이 너무 기술만 중시하고 마케팅이나 시장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들었습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련해서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1990년대 이야기인데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가 잘나갈 때 도시바 같은 세계 최고 회사들이 반도체를 매우 잘 만들었잖아요. 도시바는 '20년 버틸 수 있는 반도체를 만들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당시 삼성 D램 반도체를 현미경으로 보면 조잡하고 깨끗하지 않았어요. 그에 비해 일본 반도체는 성능이 좋았고 수율도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PC 트렌드가 5년마다 바뀌었는데 20년 버티는 멋진 칩이란 게 쓸모가 없잖아요. 일본은 기술에만 신경 썼지 시장에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게 성패를 갈랐다고 봅니다."

반도체는 비즈니스 품목을 넘어 외교안보 품목이나 국방 자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본 반도체에 미래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반도체를 잘 만드는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고 봅니다. 미국, 한국, 대만과 잘 지내야 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미·중 갈등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라끼리, 그것도 패권을 겨루는 대국이 싸운다는 건 시장으로 봐서는 마이너스죠. 반도체는 글로벌한 사업이어서 여러 나라가 협력해 만드는 것인데 말이지요. 안타깝게도 미·중 간에 알력과 경쟁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겁니다. 오래갈 테고 결국 일본과 한국에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선택적 압력이 계속될 겁니다."

‘미일 반도체 협정' 때 미국은 가치관이 같은 일본조차 무릎을 꿇렸지요.

"지금 미·중 전쟁은 미일 반도체 패권 싸움과는 결이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일본은 미국에 군사력이 완전히 잡혀 있어서 미일 교섭을 하면 일본이 지게 돼 있습니다. 중국은 달라요. 국력이나 국방력으로 봤을 때 땅도 넓고 군사력도 강해서 일본처럼 무조건적으로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에 맞서고 대항할 것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이번 경쟁은 격할 것이고 오래갈 겁니다."

일본이나 한국은 중국에 대규모 투자를 한 나라입니다. 대중국 전략과 관련해 일본과 한국에 조언을 해준다면.

"중국, 일본, 한국, 미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결속돼 있습니다. 세계화의 결과죠. 한국은 입장이 매우 미묘합니다. 밖에서 한국을 보는 국제정치학자 중에는 한국은 미일보다는 중국에 훨씬 가깝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에 대해 제가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짚고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이 70%라는 건 엄청난 힘입니다. 이것은 미국 정치가들이 한국에 간섭을 하고 교섭을 할 때 (한국 측이) 강한 레버리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의미니까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어떻게 보세요.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회사이기 때문에 그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비(非)메모리를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메모리만 해서는 불안합니다. 비메모리 회사와 협력하는 게 과제라고 봅니다. 삼성전자는 사실상 세계 유일의 종합 전자회사입니다. 반도체도 잘하고 휴대전화도 잘하고 텔레비전도 잘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런 '두루두루 1등'이 10년 후에도 계속될까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재 리소스를 그렇게 많은 분야에 과연 골고루,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 싶은 거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우려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요.

"사실 저로서는 삼성전자가 잘될 것이다, 어떨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삼성전자가 해온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일본 사람 처지에서 솔직히 매우 부럽습니다. 그간 삼성전자의 발전 전략이란 게 메모리 반도체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려 다른 부분에서 적자가 나더라도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도 D램 메모리 반도체의 힘은 쉽게 약해지지 않을 겁니다."

내가 만난 이건희 회장

그는 고(故) 이건희 전 회장을 2008년 1월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후지쓰 전략기획부장 시절이었습니다. 반도체 사업과 관련해 도시바, NEC, 엘피다 등과 전략적 제휴를 모색하고 있을 때였는데 삼성도 후보 중 하나였습니다. 삼성 재팬을 통해 이 회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서울 본사에서 만남을 주선해줬습니다."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당시는 일본 반도체 회사들의 합종연횡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후지쓰와의 협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했습니다. 후지쓰는 당시 비메모리 칩을 미에현 공장에서 만들고 있었는데 삼성은 후지쓰의 비메모리 기술을 활용해 사업을 확대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이 회장은 비메모리 사업에 대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했습니다."

첫인상은 어땠나요.

"여러 면에서 매우 뛰어난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일본어를 너무 잘해서 놀랐습니다. 와세다대에서 공부한 건 알고 있었지만 마치 일본 사람처럼 일본어를 구사했습니다.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도 와세다에서 공부했지요. 이재용 회장은 제 후배(게이오대)이기도 하고요. 이건희 회장은 제가 만나본 경영인 중에서 가장 강한 아우라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말씀이 많거나 무슨 말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압도됐다고 할까요."

그는 이 전 회장과 비슷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던 사람이 세계 최고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의 모리스 창 회장이었다고 했다.

모리스 창 회장도 만난 적이 있군요.

"두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2006년 후지쓰에서 일할 때와 몇 년 뒤 네덜란드계 증권회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저를 한 눈에 알아봐서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후지쓰 간 제휴 협력 시도는 결과가 있었나요.

"그걸 추진하던 후지쓰 부사장이 갑자기 해고를 당하는 바람에 지속적으로 하지 못했어요. 결국 후지쓰가 파나소닉과 합작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삼성전자와의 협력은 검토 단계에서 그쳤습니다."

오야마 씨와의 대화는 약 두 시간가량 진행됐다. 일본의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 대한 그의 솔직한 의견은 업계를 보는 균형적인 시각을 제시해줬다.

그와의 대화를 끝내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분명 절박감을 갖고 반도체 부활을 위한 시동을 건 것은 매우 의미가 있고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지만 그래서 '한국은 뭐하고 있나'는 식의 비판을 자동으로 갖다 붙이는 건 다소 기계적이며 패배적 발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일본이 어떤 장기적 전략에서 움직이는지 차분히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부정론자와의 인터뷰

일본은 한때 반도체 대국이었다. 그 덕분에 과거의 영광을 누렸던 개발자나 최고 경영진 인맥이 두텁다. 필자는 수소문 끝에 한때 일본의 반도체 기업을 이끌던 최고경영자였으나 지금은 은퇴해 여러 기업들에 컨설팅을 하고 있는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한국 기자는 처음 만난다고 했다. 이름 공개와 사진 촬영은 거절했지만 귀담아들을 내용이 많아 대화 내용을 옮겨본다.

일본의 반도체 부활 움직임을 어떻게 보나.

"어려울 것이다. 민간 기업들의 자발적 움직임이 아닌, 정치적 동기에 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산업이다. 비즈니스 관점으로 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일본 라피더스가 2나노를 하겠다고 했는데 경제산업성 관료들과 교수들이 모여 만든 계획이다. 한마디로 현실성이 없다.

우선은, 무엇을 목적으로 한 2나노인가 묻고 싶다. 범용 2나노를 만든다고 하는데 애플리케이션이 정확히 특정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한마디로 목표가 없다는 거다. 장기적인 수요를 보고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IBM과 만들겠다는 2나노는 일반적인 제품을 말한다. 나더러 일본이 주력해야 할 제품을 특정하라고 하면 차량용 반도체라고 말하고 싶다.

반도체 제조에서 맨 처음부터 해야 할 일이 설계다. 여기에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설계를 잘해서 한국, 대만에 보내 시제품을 만들어보면 된다. 일본은 현재 사이클 타임을 줄이겠다며 직접 팹(공장)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설계 검증 같은 것은 간단하게 오퍼레이션 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수요가 예측되면 제품을 개발하면 된다. 제품 생산도 무슨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지 등 순서가 있는데 이런 계획도 없이 갑자기 2나노를 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팹 건설은 매스컴 용어로는 좋지만 정말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스탠더드 프로세스를 만드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저전력 등에 특화시키는 것이 좋겠다. 일본의 2나노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중국 시장에 밝은 편이어서 미·중 경쟁 이야기로 넘어갔다.

"누가 칩4(Chip4)로 이득을 볼 것인가. 미국 외에 행복한 나라는 없다. 대만 TSMC가 미국, 일본, 독일에 공장을 짓고 있지만 잘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 TSMC가 잘된 이유는 모리스 창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대만이라는 한 나라에 집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만 밖에서 성공할지는 잘 모르겠다. 모리스 창은 평소 '미국에 팹을 세우는 것은 최악'이라고 했다. 생산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태도를 바꿔 미국에 공장을 세운 건 그 비용을 미국 정부가 보전해줬기 때문이다. 보조금이 없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TSMC는 최첨단 기술을 이전하지 않을 거다.

미국은 이미 CPU, GPU, 메모리, 아날로그 반도체를 모두 갖고 있다. 여기에 TSMC가 애리조나에 공장을 세움으로써 케파(생산능력)를 늘리고 있으니 미국은 더 강해질 것이다. 파운드리도 인텔이 하나 더 만들고 삼성이 만들면서 2개가 늘어난다. 결국 잠정적 경쟁자인 중국을 의식한 행위다. 중국은 미국의 규제 전에 CPU, 메모리, 아날로그 반도체를 다 갖게 될 찰나였다. 그러나 칩4로 멈추게 됐다. D램은 미국, 일본, 한국을 넘어 중국과 대만으로 갈 상황이었는데 이게 제동이 걸린 거다."

안 된다는 데 왜 할까… 반도체는 안보

앞서도 말했지만 일본의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 대한 현지의 차가운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기술도 사람도 없는데 왜 지금에 와서 반도체를 해보겠다고 나선 걸까.

기자는 그 해답의 일단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수소문하다 '2030 반도체 지정학'의 저자 오타 야스히코 씨를 만날 수 있었다.

‘2030 반도체 지정학’의 저자 오타 야스히코 씨. [도쿄=허문명 기자]
그는 기자이자 베스트셀러 저자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 기자로 출발한 그는 현재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책을 내고 있다. 그가 2021년 펴낸 '반도체 지정학 2030'은 현재 10쇄를 찍었다. 아마존 재팬에서 논픽션 부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를 만난 건 2월초, 장소는 한국의 프레스센터와 같은 도쿄의 외신 기자클럽이었다. 그 역시 일본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 비관적이었다.

"일본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기 힘든 첫 번째 이유는 한국, 대만과 기술 격차가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이다. 정부가 돈을 아무리 많이 쓴다 해도 기술적으로는 이미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 불고 있는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는 내셔널리즘이 있다. 한때 세계 넘버1이었는데 한국에 지고 대만에 지고 이제는 중국에까지 질 수도 있다는 게 억울한 거다. 그런데 반도체가 붐이니까 '원스어게인' 즉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심리가 강해졌다. 내가 일본 반도체 부활을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라고 부르는 이유다."

반도체 부활 움직임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게 신선하다.

"반도체 '메이드 인 재팬'을 외치지만 칩 제조를 모두 일본에서 하겠다는 건 가능하지 않다. 과거 일본이 반도체 패권국이었을 때와 달리 지금은 공급망이 다 글로벌화돼 있다. 일본만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민족주의 반도체'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한순간의 열기나 열정만 갖고는 지속성이 없다. 지금 반도체 부활을 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70대와 80대가 많다. 과거 반도체 1등 시절을 경험했던 세대다. 이들의 에너지와 열정은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이 움직이는 건 아니다.

부활을 꿈꾼다면 30대와 40대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젊은 사람들은 반도체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공계열 인기 학과만 봐도 그렇다. 일본의 각 대학 전자공학과는 1980~90년대 인기 학과였지만 지금은 전혀 인기가 없다. 졸업해봐야 취직할 곳이 없다. 반도체 분야 인재가 지금도 부족한데 앞으로 더 부족해질 것이다. 이 부분이 '보틀넥(bottleneck)'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 열기가 일어나는 이유는 뭔가.

"열기라기보다는 위기감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 정권이 TSMC를 무리하게 애리조나로 불러들인 게 일본에 충격을 줬다. 미국에 반도체가 집중되고 중국도 반도체 굴기를 외치는 상황에서 자칫 일본만 공동화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졌다.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는 심리가 절박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TSMC가 미국으로 가면 TSMC만 가지 않는다. 일본의 재료 장비업체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재료 장비업체들까지 일본을 떠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작동했다고 본다. 그래서 일본 정부도 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TSMC를 유치했다. 칩 설계를 할 수 있더라도 물건을 만들 공장이 없다면 강력한 공급망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구마모토 TSMC 공장과 라피더스 설립은 매우 굵직한 행보다. 이중 무엇을 더 의미 있게 보나.

"둘 다 의미 있는 조치이기는 하다. 단기적으로는 구마모토 TSMC 유치가 소재 장비업체, 일본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지 센서 1위인 소니는 TSMC와 협력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거다. 라피더스는 꿈이 크다. 피운드리 사업을 일본이 갖고 싶다는 건데, 물론 잘되면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라피더스는 3년 이상 비밀리에 계획되고 만들어졌다. 나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식 발표는 2022년 11월이었지만 나는 1월 초부터 듣고 있었다. 라피더스 설립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들이 향수, 노스탤지어로 일본 반도체의 부활을 생각하고 있구나' 했는데 정말 회사를 만들어서 놀랐다.

고이케 사장을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라피더스가 비즈니스적으로 물론 성공해야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일본의 나이든 엔지니어들에게 활력을,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목표를 주고 싶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설립 자체가 주는 임팩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피더스가 아무리 커지고 잘되더라도 TSMC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처럼 성장하기는 어렵다."

TSMC는 갑이다

미국과 일본은 TSMC 유치경쟁을 벌였다. 왜 TSMC인가.

"주문생산에 관한 한 최고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TSMC는 한마디로 기술력과 규모 면에서 '괴물' 같은 파운드리 거대 기업이다. 엔비디아, 퀄컴 등 미국 대기업을 비롯해 세계 대부분의 주요 반도체 업체가 제조를 맡기고 있다. 한마디로 TSMC 없이는 제품을 못 만든다. 미세가공기술은 이 회사의 독무대다. TSMC가 독자 개발한 실리콘 웨이퍼 운반 상자는 하나에 수천만 엔에 달한다. 일본 엔지니어들 말을 들어보면 '양산은 절대 힘들다는 어떤 설계도 TSMC는 만들어준다.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설계도만 넘기면 작동하는 물건이 나온다'고 한다.

TSMC는 지난해 2나노 신공장 건설도 시작한 상태다. 병원체 바이러스보다 더 작은 극소 세계에서 계속 왕좌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공장은 극비에 부쳐진 기술과 노하우가 뭉쳐진 결정체다. 겉으로는 하청업체인 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갑이다. TSMC는 고객을 더 강하게 만든다. 단적인 에피소드가 PC의 두뇌에 해당하는 CPU 시장에서 세계 최대 점유율을 가진 최강자 인텔을 뒤쫓던 AMD(어드밴스드 마이크로 디바이스)가 2018년 기존의 파운드리 업체에 위약금까지 물고 계약을 해지한 뒤 TSMC에 일을 맡겨 인텔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다."

TSMC 본사 위치도 지정학적으로 중요해 보인다.

"중요한 지적이다. 본사와 주요 공장 대부분이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철도로 1시간 남짓인 신주에 집결해 있다. 이곳은 TSMC를 비롯한 다른 파운드리 회사들도 즐비해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도 불리는 반도체 거점이다. 대만 경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신주 과학단지 코앞에 있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불과 250㎞ 거리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여러 개 군사 거점을 두고 있다. 푸젠성 당더에 있는 공군기지에는 초음속 최신 전투기와 미사일이 배치돼 있는데 전투기로 신주까지 딱 57분 걸린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대만 반도체 산업을 통째로 수중에 넣는 건 어렵지 않다.

홍콩을 억누른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대만을 자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홍콩과 대만은 같다고 본다. 만약 신주가 함락되면 반도체 공급망은 무너진다. 미국이 대만에 대한 관여를 강화하는 건 민주주의 진영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도체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만해협은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이다. 대만해협이 불안하면 세계평화에 먹구름이 낀다. 미국은 대만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지원도 한다. 바이든 정부는 2021년 8월 대만에 9700억 원에 달하는 무기 판매를 승인했다. 정권 출범 후 대만에 무기를 판 건 처음이다. 여기에 자주포 40량과 탄약 보급차 20대를 공급하고 대만이 계획하는 잠수함 건조에 대한 기술적 지원도 시작했다. 이게 다 TSMC의 안보적 가치 때문이다. 미·중 간에 대만 쟁탈전이 벌어지는 이유는 반도체 밸류 체인이라는 지도 위에서 대만이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TSMC 미국 애리조나 공장 전경. [TSMC]

반도체는 쌀 아닌 총알

‘반도체 지정학 2030'에서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총알이라고 했다.

"쌀이라고 할 때는 가장 기본적이고 없어서는 안 되는 제품을 연상한다. 값싼 범용 부품이라는 대량생산 이미지다. 하지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진행되면 더 이상 대량 생산방식이 아닌 소량 생산 전용 칩들이 필요하다. 반도체 개발 방식과 만드는 방식이 이전과는 확 달라질 거라는 얘기다. 이건 쌀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지금의 반도체는 생존을 위한 총알이자 심장이다. 미국이 반도체를 무기로 저렇게 나오는 것은 반도체야말로 20세기 국가의 힘을 지배했던 철강과 마찬가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앞으로 국가 기간산업의 심장은 데이터 센터다. 그 심장을 형성하는 하나하나의 세포가 반도체 칩이다. 반도체 공급이 끊기면 산업은 마비된다. 만약 한 나라가 반도체 공급망을 지배할 수 있다면 경제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세계에 1년간 출하되는 반도체 칩 수는 1980년 320억 개였지만 2020년에는 1조360만 개다. 2030년에는 2조~3조 개에 달한 것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는 반도체에 파묻힐 것이다. 반도체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

앞으로 10년 후의 세계는 지금보다 한층 더 촘촘한 데이터 기반 사회의 모습을 보일 것이 자명하다. 철이 국가 자체라는 명제 이상으로 '반도체=국가'가 된다. 각국 정부가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 공급망에 눈을 번뜩이는 이유다."

그래서 반도체 산업에 '지정학'이라는 공간적, 외교안보적 개념을 붙인 건가.

"전통적인 지정학은 지리적 조건이 국제정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하는 방법론이다. 땅과 바다에서 국가·민족 간에 일어나는 분쟁과 생존 전략을 분석하는 일 말이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공간적인 '자리 잡기' 경쟁 아닌가. 더 넓은 영토, 더 좋은 위치를 찾아 땅을 확보하고 상대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군사력을 늘리고 외교정책을 펴는 것이 국제정치다.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패권 경쟁의 무대가 있으니 바로 사이버 공간이다. 반도체야말로 공산품으로서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적대하는 국가나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미국, 한국, 대만, 중국, 일본, 독일 할 것 없이 난세에 나라를 지키는 힘이 작은 칩 속에 담겨 있다. 핵무기나 미사일은 물론이고 반도체 공급을 끊는 것이 유효한 공격수단이 됐다. 무기만 해도 2030년에는 AI(인공지능) 칩을 탑재한 로봇 무기와 드론이 배치될 것이 명백하다. 국방의 생명선인 통신망도 고속도로 정보를 처리하는 반도체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보안이 뛰어난 전용 칩이 군사력을 결정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공격무기의 핵심인 미사일도 마찬가지다. 항공모함 킬러로 게임 체인저라고 불리는 극초음속 미사일의 경우 마하 510의 속도라서 요격하기 힘들다. 이 미사일의 두뇌가 바로 반도체 칩이다. 이 칩은 누가 개발해서 어디에서 조달했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북한, 중국이 이 미사일 발사에 성공한다면 남중국해 동중국해에서 군사 균형이 붕괴될 우려가 있다.

더 무서운 것은 항공모함이나 항공모함 킬러 미사일조차 당해낼 수 없는 신무기가 실전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2020년 9월 흑해와 카스피해에 낀 코카서스 지방에서 벌어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은 아제르바이잔 측이 투입한 정찰 드론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한 이웃 터키 군이 국경 너머에서 드론을 띄워 산악지대 공격대상을 핀 포인트로 폭파한 것이다.

이에 비해 아르메니아 후원자였던 러시아에서 만든 드론은 날지 못했다. 탑재된 반도체 칩 성능 차이였던 거다. 대규모 인력을 투입해 초고가 항공모함을 움직이던 20세기형 전쟁은 이제 끝났다. 앞으로는 소수의 저비용 무기를 소수의 인간이 조작하는 기술력이 군 경쟁력의 관건이 될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반도체 전쟁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는 것도 반도체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야말로 반도체의 우열이 전쟁에 크게 작용하면서 첨단 고기능 반도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입증시키고 있다. 미국이 개전 초기부터 러시아 통신망을 차단시키는 바람에 러시아 고위 책임자들과 군 장성들이 현장에서 직접 작전을 지시해야 했다.

또 첨단 반도체가 탑재된 서방의 신형 미사일이 러시아군을 제압하고 있다. 구 소련은 높은 수준의 반도체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현재는 수준이 낮아져서 서방에 비길 바가 아니다. 설계는 한다 해도 파운드리가 없어 반도체를 만들 수도 없다. 이전처럼 TSMC에 위탁할 수 없어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그는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판에 미군은 막 완공된 거대 폭격기 B-29를 전선에 투입해 가장 먼저 기타큐슈 하치만 제철소를 폭격하면서 당시 일본의 심장인 고로를 파괴했다. 지금은 반도체가 그런 위치다. 미국이 중국과의 무역을 제한하는 흐름은 가속화할 것이다. 미중에 한정하지 않고 반도체를 확보하는 것이 모든 나라에 필사적으로 중요한 국가안전보장 정책이 됐다."

오타 씨는 미국, 중국, 유럽 등 세계 강대국들이 반도체 보조금 경쟁을 벌이는 것을 미소 군비확대 경쟁에 비교하기도 했다.

"미국, 중국, 유럽 등 세계 강대국들은 40조 원부터 90조 원까지 마치 눈사태라도 맞은 것처럼 보조금 경쟁을 벌이고 있다. 상대가 군사비를 늘리면 이쪽도 늘린다는 점에서 마치 20세기 미소 군비 확대 경쟁과도 같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군사력 경쟁만이 아니라 기술 개발경쟁도 치열하게 했다.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케네디 정부의 아폴로 계획도 군 확대 경쟁과 무관치 않았다. 그 결과 자유경쟁으로부터 격리된 군사 산업이 발달했고 항공공학, 컴퓨터, 통신, 소재, 로켓, 화학, 의학 분야에서 미국이 세계를 압도하는 강한 힘을 구축했다. 현재 각국의 보조금 경쟁은 신 군비경쟁이나 마찬가지다. 자유무역주의, 자유방임주의는 시들해질 것이고 정부의 산업 개입 흐름은 가속화할 것이다. 그 필두에 반도체가 있다."

한국은 자기 힘을 쓸 줄 모른다

미국이 종국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반도체 공급망 완성하기'다. 바이든은 대통령 취임 한 달여 만인 2021년 2월 24일 연설에서 '쇠 발굽이 망가졌는데 못이 없으면 말을 못 탄다'는 비유를 했다. 옛날에는 말이 없으면 왕국이 망했다. 여기서 말하는 못이 바로 반도체칩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설계는 뛰어나지만 파운드리 기업이나 웨이퍼 절단, 패키징 같은 후공정 산업은 취약하다. 바이든이 TSMC를 애리조나에 유치한 건 미국 내에서 설계부터 제조까지 자체 칩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그렇게 하면 외국으로부터 반도체 산업을 지킬 수도 있고 외국을 공격할 수도 있게 된다. TSMC 애리조나 공장은 2021년 착공돼 2024년 조업을 시작한다. 회로 선폭 5나노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 2만 장의 웨이퍼를 생산할 예정이다.

세계 1, 2위를 오가는 반도체 메이커인 인텔은 TSMC 가동에 맞춰 2024년 가동을 계획으로 피닉스와 인접한 챈들러에 공장 두 개를 이미 짓고 있으며 파운드리 사업에도 뛰어들어 다른 반도체 업체로부터 제조를 위탁받을 계획이다. 인텔의 투자는 미국의 기술혁신과 리더십을 지키고 미국 경제와 국가안보를 강화할 것이라고 상무장관이 성명을 냈을 정도다.

세계 반도체 제조 파운드리 2020년 점유율을 보면 대만이 60%대, 삼성전자가 13%대로 아시아 두 개 회사가 70%대인데 다른 파운드리나 인텔 파운드리까지 합치면 미국 정부 영향 아래 있는 기업이 세계 반도체 제조의 거의 90%를 지배한다. 미국 정부는 이번에 반도체법에서도 보여줬듯 기술이전, 이익 공유, 자금 수주, 재고상황, 고객정보까지 공개하도록 압박하는 상황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수요는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자동차산업이다. 미국은 그 거대한 구매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반도체 회사를 미국에 집결시켜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개편하려는 속셈이다."

밖에서 보는 한국은 어떤가.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스스로가 자신을 너무 작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대만은 중국에 대해서도 미국에 대해서도 강한 파워 밸런스를 갖고 발언권이나 교섭권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은 대만과 충분히 비슷하거나 똑같은 힘을 갖고 있는데도 자신이 없는 건지 대책이나 전략이 없는 건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 내부에서도 미국과 중국이 싸우고 있는 상황은 기회라는 시각에서 이런저런 반도체 대책을 세우고 있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일본 이상으로 강한 위치에 있고 뛰어난 기술과 공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무례한 말이라는 걸 용서해준다면, 한국은 좀 변명이 많은 것 같다(웃음). 북한 때문에 안 된다든지 중국에 공장을 많이 세워서 움직임에 여유가 없다든지 하는데 그런 변명을 넘어서 뭔가 대책을 세우면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이 대목에서 "미들 파워 국가로서의 정체성"이란 말도 했다.

"미국, 중국 등 큰 나라들은 슈퍼파워 게임을 한다. 헤게모니 대립이다. 대국의 운명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 같은 미들 파워 국가만 가능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게 정부와 비즈니스 리더들의 책임이다. 그런 걸 대만이 잘한다."

반도체가 이슈가 된 상황에서 한일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

"나도 같은 생각이다. 지금처럼 간다면 모든 것이 미국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한국, 대만, 일본의 협력이 중요하다. 미국에도 중국에도 발언력을 가져야 한다. 한국은 중국과 깊은 비즈니스 관계를 갖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중국에 어떤 스탠스로 임할지 일본에서 굉장히 주목하고 있는데, 분명치 않으면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한일 간에 무언가 좀 해보려 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라 본다."

도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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