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의 폐해에 경종…신간 '조금 수상한 비타민C의 역사'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15세기말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려고 유럽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대륙 남쪽 바다를 통과하는 6개월이 넘는 여정에 나섰을 때 선원들은 정체불명의 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팔다리와 잇몸이 부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기도 했다. 일부는 아프리카 해안에서 오렌지를 먹고 건강을 회복했다.
탐험대를 괴롭힌 질병은 바로 비타민C 결핍으로 생기는 괴혈병이었다.
당시 선원들이 항해 중에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부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료·과학 지식이 부족한 당시 인류는 왜 이 질병에 걸리는지 알지 못했고 이후에도 장기 항해에 나서는 이들은 괴혈병에 시달렸다.
신간 '조금 수상한 비타민C의 역사'(한빛비즈)는 비타민C와 관련된 인류의 500년 역사를 추적하면서 선입견이 생각을 구속해 증거를 객관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과학자이며 과학저술가인 저자 스티븐 M. 사가는 비타민C와 관련된 연구 과정에서 벌어진 비상식적인 사례를 추적하며 숙련된 과학자조차 선입견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옛사람들은 오렌지와 레몬이 괴혈병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서도 병의 원인이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등 헛다리를 짚는 추측을 이어갔다.
괴혈병과 비타민C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는 무려 400년이 걸렸다.
영국 해군에서 보건 위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린드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1746년 군함 솔즈베리 호에 탑승한다.
다음 해 그는 괴혈병에 걸린 선원 12명을 6개 그룹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식단을 제공해 오렌지와 레몬을 섭취한 그룹이 호전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실험은 역사상 최초의 통제된 임상시험으로 유명하다.
이듬해 해군에서 퇴역하고 개인 진료소를 연 린드는 괴혈병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앞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함선 내부의 공기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주요 원인은 공기의 질, 즉 습기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추위와 습기의 결합이 이 질병의 가장 강력한 발병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가 신선한 녹색 채소의 섭취 부족인 괴혈병의 부수적 원인이라고 인정한 점은 눈길을 끈다.
저자는 당시 린드가 "실험에서 얻은 교훈과 당대의 지배적 이론을 기반으로 왜곡된 추론에 의존"했다고 평가했다.
괴혈병에 관해 연구한 이들은 건강한 젊은이들의 몸에 고통을 주고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을 유발하는 등 현대의 관념으로는 용인할 수 없는 비윤리적 인체실험을 하기도 했다.
편견 때문에 합리적 판단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준 인물은 노벨 화학상과 노벨 평화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인물인 미국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1901∼1994)이다.
그는 비타민C를 만병통치약처럼 홍보했으며 동료 학자들의 심사를 거치는 학술지에는 검증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상태에서 1970년 '비타민C와 감기'라는 책을 출간해 비타민C를 다량으로 섭취하면 감기의 발병 횟수가 줄고 중증도가 낮아진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비타민C를 권장량보다 과하게 섭취하는 이른바 '메가도스'를 유행시켰다.
폴링은 "아스코르브산(비타민C의 화학명)은 모든 질병을 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주장까지 한다.
비타민C에 관한 폴링의 연구는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권위 있는 학술지들이 논문 게재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그는 이를 음모로 간주하고 수용하지 않았다.
폴링은 1991년 직장암과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뒤에는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을 거부하고 고용량 아스코르브산을 섭취하며 식이요법을 실천하다 1994년 생을 마감한다.
저자는 비타민C 메가도스가 "과학적인 근거도 거의 없는" 요법이라고 규정한다. 또 폴링은 떠났지만, 그가 내세운 강력한 주장 등의 영향으로 비타민C가 최근 50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비타민이 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김주희 옮김. 296쪽.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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