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가는 전기요금 결정…정치권, 한전 적자 책임 돌리기 급급[세종백블]
정치권·물가당국, 전기요금 인상 매번 제동
한전, 임금동결 등 자구책 발표계획…거취표명 요구엔 말 아껴
[헤럴드경제=배문숙 기자]여당인 국민의힘에서 올해 2분기 전기·가스요금 인상여부를 잠정 보류시키면서 한국전력이 최악의 자금난을 겪고 있다. 한전은 전기를 팔수록 손해인 적자 구조를 고려하면 2분기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거듭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내년 4월 총선을 의식해 문재인 정부에서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한 것처럼 공공요금 인상을 누르는 형국이다. 여기에 전 정권에서 임명된 점을 강조하면서 정승일 한전 사장 ‘사퇴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 사장을 사퇴시키고 낙하산 인사를 임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30일 한전에 따르면 현재 전기요금을 통한 원가 회수율이 약 70%에 불과해 발전사에 지급하는 전력구입대금을 매달 4회(평균 9일 간격) 사채를 발행해 조달하고 있다.
문제는 올해도 적자가 5조원 이상 발생할 경우 내년에는 한전법에 규정된 사채 발행 한도(자본금과 적립금을 합한 금액의 5배) 초과가 예상된다는 점이다. 한전은 사채 발행에 차질이 생기면 전력구매대금과 기자재·공사대금 지급이 어려워져 전력산업 생태계 전반이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매년 6조∼7조원 수준인 송·배전망 투자가 위축돼 발전사가 생산한 전기를 수요처에 보내지 못하게 되면 발전소의 출력제한이 확대되고 전력계통의 안정성이 취약해질 우려도 있다.
또 전기요금 인상이 지연되면 한전채 발행 규모를 늘릴 수밖에 없어 한전채 ‘쏠림 현상’으로 인한 채권 시장 교란이 발생할 수 있다. 채권 총 발행액에서 한전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4.8%(37조2000억원)에 달했고 올해는 벌써 2.6%(5조3000억원)를 차지하고 있다.
한전의 하루 이자비용은 약 38억원으로, 이미 국민 1인당 매월 약 2200원의 추가비용을 부담하고 있는 상황이다. 2022년 기준 한전의 전력구입단가는 kWh당 153.7원인 반면 판매단가는 120.5원이었다. 전기를 팔수록 kWh당 33.2원의 손해를 본 것이다. 전년과 비교하면 전력구입단가는 연료비 상승으로 90.5% 올랐으나 판매단가는 9.7% 증가에 그쳤다.
이런 상황속에서 정치권과 업계 안팎에선 정 사장의 거취 표명이 2분기 전기요금 결정의 선결 조건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전기요금 결정과 관련한 당정협의회를 이끄는 박대출 정책위의장도 지난 28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정 사장의 사퇴를 공개 요구했다. 국민의힘의 이 같은 강경한 입장 이면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부담감과 함께 이전 정부에서 임명된 현 경영진에 대한 불편한 기류가 깔렸다고 볼 수 있다.
전기요금 현실화의 필요성은 문재인 정부시절인 2018년 김종갑 한전 사장부터 줄곧 제기됐다. 당시 김 사장은 페이스북에 '두부 공장의 걱정거리'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저는 콩을 가공해 두부를 생산하고 있다"면서 전기요금을 연료가격 변동 등 시장 원칙에 따라 정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설명한 바 있다. 액화천연가스(LNG)와 석탄 등 연료를 수입해 전기를 만드는 한전의 역할을 두부 공장에 빗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에서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물가당국인 기획재정부의 반대로 원료비는 급등해도 전기요금이 인상되지 않다보니 한전의 재무구조가 최악을 맞게 된 것이다는 대체적인 분석이다. 결국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도 문재인 정부의 전기요금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최악의 적자 책임도 한전에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전은 전기요금 인상에 따른 국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20조원 이상의 재정건전화 계획과 임직원들의 임금동결을 골자로 한 자구책을 마련,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다. 한전이 내놓을 자구책에 쏠린 이목을 고려해 최근엔 근로자의 날을 맞아 전 사원에게 지급한 온누리상품권 10만원도 다시 회수했다.
정승일 사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중에도 수차례 경영진과 임직원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열고 경영 현안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당초 정 사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발표한 방미 경제사절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최종 명단에선 제외됐다.
이를 두고 최근 한전 이슈에 민감한 여권의 기류가 반영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지만, 한전 측은 “자구책 마련을 위해 국내에 남은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관가 한 관계자는 “국민의힘에서 정 사장 거취를 거론하는 것은 정 사장 후임으로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러나 지난해 연료비 폭등에 따른 도매가격 상승분을 전기요금에 제대로 반영 못해 32조70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공기업에 정치권 낙하산 인사가 임명될 경우, 파장은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oskymo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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