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풍향계] '고무신 선거'의 망령?…정국 흔드는 '돈봉투' 파문
[앵커]
검찰의 칼 끝이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로 향했습니다.
바로 송영길 전 대표 당선을 둘러싼 '돈봉투 살포 의혹'인데요.
선거판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은 아닌지, 정국이 또 한 번 요동치고 있습니다.
이번 주 여의도 풍향계에서 최지숙 기자가 들여다봤습니다.
[기자]
정치판의 오랜 유령이 지금 여의도를 흔들고 있습니다.
2년 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다수의 돈 봉투가 뿌려졌다는 의혹인데요.
드러난 얼개는 아직 엉성한 수준이지만, 검찰 수사는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금권 선거'는 말 그대로 돈의 위력을 이용한 선거입니다.
온전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국가에서 나타나는 후진적 매표 행위인데요.
당내 선거라고는 하지만, 21세기 한국 정치에 등장한 금권 선거 의혹은 그 자체만으로 새삼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2021년 5월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대표 후보였던 송영길 후보 캠프에서 9,400여만 원의 불법 자금을 살포했다는 의혹입니다.
당시 전당대회 결과는 송 후보의 승리로 돌아갔는데요.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의 개인 비리를 들여다보던 검찰은 이 씨의 휴대전화 녹음 파일에서 돈봉투 살포 정황을 포착하고 지난 12일, 관련자들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습니다.
이재명 대표에 이어 또 한 번 사법리스크 정국을 맞은 민주당은 당혹감 속에 자체조사를 검토했지만, 역풍을 우려해 검찰 수사를 지켜보기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시선은 자연스레 송영길 전 대표에게 쏠렸고, 민주당은 앞서 프랑스 파리에 있던 송 전 대표의 조기 귀국을 촉구했습니다.
<이재명 / 더불어민주당 대표(지난 17일)> "정확한 사실규명과 빠른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송영길 전 대표의 조기 귀국을 요청했다는 말씀도…"
송 전 대표는 파리 기자회견에서 '사실관계를 떠나 사태에 책임을 지겠다'며 탈당을 선언한 뒤 귀국했는데요.
<송영길 /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지난 22일)> "가능한 빨리 귀국해 검찰 조사에 당당히 응하고 책임지고 사태를 해결하겠습니다."
다만 해당 의혹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송영길 /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지난 22일)> "후보가 그런 캠프의 일을 일일이 챙기기가 어려웠던 사정을 말씀 드립니다."
만에 하나 사실로 밝혀진다면 한국 정치의 시계를 수십 년 전으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의혹 앞에 선 민주당의 반응이 좀 석연치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신중론을 취하고 있지만, 당내 일각에선 관행쯤으로 치부하며 애써 사태를 축소해보려는 분위기도 읽힙니다.
'돈'과 '조직력'이 필수인 선거판에서 흔히 있어온 관행이라는 겁니다.
귀국한 송 전 대표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물론, 일부 의원들은 수사 대상 금액을 놓고 '한 달 밥값도 안 된다'거나 '식대 수준'이라는 발언을 해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공식 사과에 나섰던 이재명 대표는 돈봉투 의혹에 관한 취재진의 질의에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혐의를 받는 여권의 김현아·박순자 전 의원을 들어 되치기에 나섰는데요.
<이재명 / 더불어민주당 대표(지난 25일)> "우리 박순자 (전 미래통합당) 의원 수사는 어떻게 돼 갑니까? 관심 없으신가 보군요."
비이재명계에선 국민 불신만 키울 수 있다며 "부적절한 언사"라는 쓴소리도 나왔습니다.
일신할 계기를 애써 외면하려는 기류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입니다.
지도부 설화와 전광훈 목사 논란에 둘러싸여 곤혹을 치르던 국민의힘은 '도덕성' 공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기현 / 국민의힘 대표(지난 25일)> "도덕 불감증을 넘어서 이제 도덕 상실증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저는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보란듯 김현아 전 의원에 대한 당 차원의 진상조사를 벌이기로 결정하면서 민주당과 차별화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금권 선거의 유혹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선거판에서 되풀이 돼 온 구태입니다.
그 중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은 이번 의혹과 닮은꼴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박희태 전 의장은 2008년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표최고위원 당선을 목적으로 돈봉투를 건넨 혐의를 받았는데, 고승덕 전 의원의 뒤늦은 폭로가 도화선이 됐습니다.
<박희태 / 전 국회의장(2012년 1월)> "4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모르는 일이다, 이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재판에 넘겨진 박 전 의장은 '교통비 지급 등 관행일뿐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취지로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위법성과 비난 가능성이 크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 오래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국 단위 선거에서 대규모 금권 선거가 벌어지곤 했지만 그 끝은 좋지 않았습니다.
권력 연장을 위해 각종 불법행위가 자행됐던 3·15 부정선거는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른바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로 불리는 오명을 썼는데, 농촌 지역에 막걸리와 고무신을 살포하는 매표 행위로 부정선거 논란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이 같은 한국 정치사의 부끄러운 단면들은 유감스럽지만 이후에도 최근까지, 지방선거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선거에서 망령처럼 떠돌았습니다.
'일단 이기고 보자'는 승리 지상주의와 걸리면 '운이 나빴다'고 치부하는 도덕 불감증이, 어렵게 토대를 다진 민주주의를 훼손해 온 겁니다.
정치권이 자초한 불신 탓에 국회의원들은 흔히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사실 국가의 근간인 '입법권'이라는 큰 권한을 헌법상 보장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동시에 다양한 책무를 지는데, 그 중 헌법 제46조 1항에는 국회의원의 '청렴 의무'가 명시돼 있습니다.
그 특별한 권한 만큼, 정치인의 도덕성을 무거운 의무로서 국가 기본법에도 적시한 셈입니다.
의혹의 진위 여부를 떠나, 정치권이 이번 사건을 대하는 자세를 엄중하게 되짚어 볼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의도 풍향계였습니다. (js17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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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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