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에 담긴 다양한 빛깔…일상과 역사를 전하다
‘소색비무색, 흰옷에 깃든 빛깔’ 기획전
표백·염색하지 않은 자연색 옷
조선시대 ‘소색’ 유난히 선호
회백색·진주색·살구색 등 다양
박물관에서 시공 초월해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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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그림이나 근대 흑백사진에는 수없이 많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임금 행차를 기록한 그림 속의 구경꾼들은, 선비든 일반 백성이든 대부분 흰옷이어서 자연스레 ‘백의민족’이라는 익숙한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 백의는 도화지 같은 순백색 옷이 아니었다. 옛사람들에게 흰옷이란 표백이나 염색을 하지 않은 자연색 옷을 뜻했다. 전통색에서는 이를 소재 본래의 바탕색이라는 뜻으로 ‘소색’(素色)이라고 불렀다.
국립민속박물관과 경운박물관의 공동기획전인 ‘소색비무색(素色非無色), 흰옷에 깃든 빛깔’은 이 소색으로 된 옷과 관련 자료 190여점을 모은 전시다. 조선은 염색 기술과 염료 재배가 발달한 나라였지만, 사람들은 유난히 흰옷을 많이 입었다. 그 까닭으로는 △조선시대에는 흰옷을 기자조선의 유습으로 여기는 인식이 있었고 △염색을 안 하면 옷을 짓는 비용도 덜 들며 △상복이나 평상복으로도 두루 입을 수 있어 경제적이었다는 분석이 따른다. 입기 무난하고 가성비가 좋은 옷이었다는 얘기다.
햇살 머금은 다정한 팔레트
이 전시는 옛 그림과 흑백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일상을 채웠던 빛깔들로, 상상 속의 과거를 다시 그리게 한다. 소색은 무색이 아니라는 전시 제목은 1963년 이어령이 쓴 ‘백색은 색이 아니다’라는 글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자연 재료와 실, 옷감을 알아보기 쉽게 배치한 전시 도입부를 살펴보면, 소색은 넓은 스펙트럼 같은 색조로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시에는 모시풀의 색이, 무명에는 목화솜의 색이, 비단에는 누에고치의 색이 깃들어 있다. 회백색부터 진주색, 노랑, 살구색, 연갈색 등이 모두 소색에 포함된다.
전시 1부에는 모시, 삼베, 무명, 비단으로 지은 한복에서 추출한 색을 모아 색상표로 정리한 ‘소색 옷감 팔레트’도 진열돼 있다. 그 표를 들여다보면, 1911년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한국인들이 입은 흰옷을 “햇빛처럼 밝아서 어디서나 독특한 친근함을 자아낸다”고 묘사했던 이유를 깨닫게 된다. 땅 위에 쏟아지는 햇살을 머금은 듯한 따뜻하고 다정한 색이다.
전시의 압권은 날개를 펼친 새들처럼 겹쳐 걸린 11벌의 저고리들이다. 생초, 갑사, 항라, 춘포, 자미사 같은 옷감 이름은 눈에 익지 않아도, 사뿐한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하나를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전체를 보면 똑같은 색이 없다. 그냥 ‘회색’ 티셔츠 한벌 사고 싶은데, 어째 마음에 꼭 드는 ‘회색’이 없어 옷가게들을 빙빙 돌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시 2부의 수많은 소색들을 무심히 지나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전시에선 옷감이 소재가 같아도 실의 질감과 짜임새에 따라 다른 빛을 낸다는 점을 공들여 전달한다. 곱게 정련한 가벼운 실은 사물의 실루엣이 환히 비칠 정도로 투명한 옷감을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옷감을 만들고 옷을 짓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세탁한 뒤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 다림질을 거치며 낸 반드르르한 광택까지 포함해 비로소 하나의 옷색이 완성된다. 이 각기 다른 소색들은 옷 한벌에 담겨 있는 수많은 정보들을 종합한 메타데이터인 셈이다.
1940년대 저고리에 20세기 단속곳
다른 사람들의 옷이 박물관에서 만나 새로운 관계로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또 다른 재미다. 인물 모형과 가상 소프트웨어로 저고리와 치마, 속옷, 브로치 등의 유물을 조합한 착장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멋들어지게 완성된 조합은 사실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들이다. 1940년대에 만든 저고리, 20세기 중반에 만든 치마에 20세기 초반에 만든 단속곳(여성 속옷 종류)을 받쳐 입히는 식이다. 기증자도 모두 다른데, 마치 원래 짝이었던 것처럼 어울려 보이는 재미가 있다.
1940년대 혼수품으로 마련된 비단 옷감과 두루마기도 이러한 전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몸에 걸치면 기분 좋은 무게감으로 착 감길 것 같은 비단은 지금도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그 아래에는 한글로 종류와 색, 용도를 알뜰히 적었던 포장지가 함께 진열돼 있다. 이걸로 옷을 지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생각하며 돌아서면, 비슷한 소재로 지은 두루마기가 짠, 하고 나타난다. 아주 좋은 날 차려입었을 근사한 정장으로, 할머니가 젊은 시절 입던 옷을 손녀가 기증한 유물이다.
전시 3부에서는 소색에 어우러지던 작은 빛깔들을 소개한다. 특히 조선 말기 유학자 전우(1841∼1922)가 착용했던 의복과 쓰개들은 소박하지만 기품이 넘친다. 모시에 검은 선을 둘러 정자관 모양을 낸 쓰개는 현대미술의 추상 조각 같기도 하고, 오늘날 전하는 전우 초상 속의 말쑥한 모습이 덧보이기도 하는 재미있는 물건이다.
살아서는 일면식조차 없었을 삶은 그들이 남긴 물건을 통해 전시실 이곳저곳에서 연결된다. 오래된 물건이 세상으로 나와 문화재가 될 때에는, 이렇게 과거의 내력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얻게 된다. 지난 20년간 500여명의 기증자를 맞이하며 근현대 복식 컬렉션을 성장시켜온 경운박물관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점이기도 하다.
전시실을 나오기 전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있다. 알루미늄 상자에 가득 담긴 면실 타래다. 얼핏 보면 그저 오래된 실 같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한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다. 1927년 아버지 돌상에 놓았던 면실에다, 일곱 자매의 돌잡이 면실을 한 상자에 담아 같이 보관해온 것이다. 아버지의 돌부터 막내딸의 돌까지, 꼭 40년이 걸렸다.
상자 속 소색 면실들은 저마다의 삶의 바탕이 그러하듯 그 색도 굵기도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모든 삶이 튼튼히 이어지기를, 자기만의 짜임을 찾아 제빛대로 밝게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자신의 본바탕을 돌아보게 한다. 그건 어떤 빛깔일까. 빛이 바래도 여전히 고운 소색 옷들을 보고 나면, 감추고 있던 자신의 바탕색도 정성껏 어루만지고 싶어진다.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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