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되었나 [독서일기]
〈악에서 벗어나기〉
어니스트 베커 지음, 강우성 옮김
필로소픽 펴냄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한빛비즈, 2019)은 스케일이 크다. 문화인류학자였던 지은이의 학문적 꿈은 종합이었다. 그는 인류학자·심리학자·철학자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한 학파는 삶을 기쁨과 축제로 여기면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본다. 다른 학파는 죽음이 자연현상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결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고 본다. 지은이는 말한다. “나는 솔직히 두 번째 학파 편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겉모습 아래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첫 번째 학파의 대표 인물은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익히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로 성을 꼽았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창안으로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거세당할 것이라는 공포)’에서는 남아(男兒)의 성이 문제가 된다. 그는 유아에게도 성욕이 있고, 부모와 남아가 삼각 연인 관계를 이룬다는 설정으로 당대의 많은 중산층·교양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베커는 남아의 성 욕동(欲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이며 핵심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유아의 근심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소멸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기 확장을 할 것인가’에 모아져 있다(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논리에서는 남아만이 문제가 된다). 그런 유아에게 찰싹 들러붙어 유아의 근심을 덜어주고 유아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사람은 어머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는 이 상황이 유아에게 무력감을 안기고 남아는 거세 콤플렉스를 앓게 된다.
아버지와의 대결로부터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일체감에서 남아의 거세 콤플렉스가 생겨난다는 베커의 주장은 프로이트의 논리와 정반대다. 어머니와 하나가 되는 것이 찜찜한 남아는 이제 아버지를 동경하게 된다. 어머니는 생명과 죽음 모두를 체현하고 있지만 살과 땅에 더 가깝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 아버지는 신체적으로 더 중립적이고 몸의 결정론에 덜 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와 벌이는 성 대결이 아니라, 소멸로부터 달아나고 자기 확장을 이루려는 하나의 기획이다. 그 기획의 또 다른 작전명은 ‘죽음의 정복’ 또는 ‘죽음의 부정’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인간은 “통합과 확장”이라는 두 가지 심리적인 기술에 의지한다. 끝없는 자기애의 확장은 흔히 나르시시즘이라 불리며 통합은 ‘전이(轉移·transference)’를 뜻하는데, 죽음을 부정하려는 인간이 택한 중요한 심리적 기술은 전이다. 죽어야만 하는 인간은 전이를 통하여 신이나 영웅 같은 나보다 더 강력한 실체와 통합된다. “신은 구체적 개별자가 아니기에 자신의 개인적 의지와 욕구에 따라 우리의 발전을 제한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적 대상도 이 일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의 위대함과 힘 속에 머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결코 방해받지 않고서 스스로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다.”
전사한 병사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의례
신이 인기가 없어지고, 영웅의 시대가 저물면서 현대인은 돈과 소비, 좋은 주택과 자동차, 남의 자녀보다 더 똘똘한 내 자녀에서 “대리 불멸”을 구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현대인이 찾아낸 가장 낭만적인 해법은 ‘너’, 바로 사랑이다. “대중가요에서 연인은 ‘봄철’이요 ‘천사의 빛’이요, 눈은 ‘별처럼’ 빛나고 사랑의 경험은 ‘천국처럼’ ‘거룩하’다. 요점은 사랑의 대상이 신적인 완벽체라면 자신의 운명을 그것에 합침으로서 자신의 자아를 고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이를 통한 통합은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우리는 ‘아미(ARMY)’도 되고, ‘건희사랑’이나 ‘실용오디오(오디오 커뮤니티)’ 회원도 되고, 두산이나 한화 야구단의 팬도 되고,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 서로 ‘좋아요’를 눌러준다. 농담 삼아 꺼내본 이런 전이는 무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집단적 전이가 언제나 무해한 것은 아니다.
〈악에서 벗어나기〉(필로소픽, 2023)에서 베커는 인간에게 ‘악’은 다른 게 아니라고 말한다. 내 생명을 위협하고, 나의 활동을 멈추게 하려는 바로 그것이 악이다. 이 악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인간은 종교·영웅·이념·상징·예술 등의 문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인간이 죽음을 극복(부정)하기 위해 만든 그것들이, 갈등을 만들고 심각하게는 전쟁을 일으킨다. 왜 그럴까. “각 개인은 자신이 충실하게 따르는 자기 영속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스스로의 불멸성을 배양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삶은 획득 가능한 유일하게 지속적인 중요성을 얻는다. 상대방이 진리에 관한 논쟁에서 이기면, 당신은 죽는다. 당신의 불멸성 시스템이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에, 당신의 삶은 오류 가능성에 빠진다.” 그러니까 나의 신, 나의 영웅, 나의 이념, 나의 상징(‘나는 보신탕 먹는 사람이야’ 같은 것)을 건드리는 자는, 나의 불멸 시스템(가치)을 망치기 때문에 처단되어야 한다.
인간이 죽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을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이는 비록 죽음이 자연적 공포라 할지라도, 이 공포는 항상 자신의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이용되고 착취되어왔다는 뜻이다. 죽음은 엘리트가 유순하고 순종적인 대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도록 돕는 사회적 통제와 억압의 수단으로, 원시시대부터 사회가 활용해왔던 ‘문화 메커니즘’이다.”
국가는 전사한 병사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의례를 하면서 전사자에게 마치 불멸을 선사한 듯이 생색을 낸다. 인간이 죽음이라는 악(A)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문화가 더 커다란 새로운 악(AA)을 만들었다. 어떻게 해야 이 ‘악무한(헤겔 철학에서 한없이 나아가는 운동 과정을 이르는 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죽음 부정의 문화’가 바로 악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면 해결책이 있을까.
문화는 불사의 기획이라는 지은이의 논리 전개는 그가 비판하는 프로이트의 후기 저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성 담론(쾌락원칙) 역시 승화를 거쳐 문명론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차이는 전자가 성에서부터 시작했고 후자는 죽음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에 대한 존경과 비판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베커의 암시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평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노골적으로 성 도식에 집착했던 이유도 성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살짝 은닉하고, 망각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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