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득 안 되는 딸의 죽음…왜 잊으라고만 하나요”

송윤경 기자 2023. 4. 3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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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159명의 청년이 목숨을 잃은 이태원 참사가 6개월을 맞았다. 반년의 시간이 흘러 봄이 왔지만, 유족들에게 치유의 시간은 아직 허락되지 않고 있다. 유족이 애타게 알고 싶은 ‘그날의 진실’이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지난겨울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의 수사와 국회 국정조사가 있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경찰 특수본의 수사는 법적 책임에 국한한 ‘꼬리자르기’로 끝났다. 국회 국정조사는 여야 대립 속에 헛돌았다. 유족들이 제대로 된 진상조사를 줄곧 요구해온 배경이다.
지난 4월 20일 더불어민주당·정의당·기본소득당·진보당은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독립적인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위원회에 특별검사 도입 요구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뼈대다. 국민의힘은 이 법안을 두고 “국민의 아픔마저 정쟁의 도구로 삼으려는 병이 다시 도진 것”(장동혁 원내대변인)이라고 했지만, 유족들은 “진실을 알자는 것이 어떻게 정쟁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유족들이 갈구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태원 참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간경향은 지난 4월 19일과 20일, 25일 송진영씨(고 송채림씨 아버지)와 조미은씨(고 이지한씨 어머니), 최정주씨(고 최유진씨 아버지)를 각각 대전과 서울 등에서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태원 참사 6개월] (2)고 최유진씨 아버지 최정주씨 인터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최유진씨가 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최정주씨 제공

“진아 어디? 이태원 핼러윈 안 갔지? 사고 났다는데. 진아, 통화 중이네. 톡 남겨줘. 진아, 자고 있음 다행이고 전화나 문자 줘, 진아. 걱정해. 진아, 진아, 진아, 늦어도 되니 전화나 톡 보면 전화 줘.’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10월 30일 자정 무렵, 최정주씨(54)는 딸에게 11통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없었다.

사흘 후 아버지는 딸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진아, 방금 아빠, 진이 좋은 곳에 데려다 놓고 왔다. 진아, 아빠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고 아빠가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제 좋은 곳에서 좋은 마음으로 편히 쉬어라. 아빠 딸 유진이 영원히 사랑한다.“

딸의 휴대폰에 메시지를 다시 보내기까지의 절규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날 밤 아버지는 이태원에 있는 유진씨 작업실을 찾았지만 유진씨는 없었다. 친구들로부터 전날 밤 10시 12분까지는 연락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새벽 2시 30분쯤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리고 새벽 3시, 차가운 주검이 된 딸을 만났다.

그날 밤 10시

최정주씨가 간절히 알고픈 것은 딱 한 가지다. ‘10시에서 1시까지’의 진실이다. 유진씨는 10월 29일 밤 10시 12분까지도 친구들과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10시 50분엔 친구에게 유진씨의 전화가 걸려왔고, 말이 없다가 10초 뒤 끊겼다고 한다. 구급일지로 확인한 딸의 사망 추정시각은 12시 무렵이고 병원에 이송된 것은 1시쯤이다.

딸이 10시대 후반까지도 숨이 붙어 있었지만 방치됐던 것은 아닐까. 응급조치를 빨리 받았더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재난 현장을 수습한 지휘부는 어디인가. 생존자들에게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사망자 이송’ 위주의 수습을 한 것은 아닌가. 최정주씨는 지난 6개월간 이런 질문들에 단 하나의 답도 얻지 못했다고 했다.

실제로 이태원 참사 발생 추정시각인 10시 15분 이후 현장 상황은 어땠을까. 10시 29분 현장에 최초로 진입했던 소방대원 중 한명은 국회 국정조사에서 이런 증언을 했다. “구조한 사람들을 놓을 장소조차 마련되지 않을 정도로 인파가 통제되지 않았다. 경찰 출동을 엄청나게 요구했지만, 초기 현장에서 경찰은 두명 봤다. 소방관들이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없었다. 너무나 외로웠다.”

이태원 참사 유족 최정주씨(희생자 최유진씨의 아버지).가 25일 주간경향과 만나 얘기하고 있다. 최씨가 착용한 스카프는 최근 유족들이 제작한 것으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상징한다. 서성일 선임기자

소방당국은 10시 18분부터 경찰에 출동을 요청하는 무전을 수차례 보냈지만, 인근 경찰들만 투입됐을 뿐 경비기동대는 11시 40분이 돼서야 도착했다. 국정조사에서 경찰은 소방 측이 피해 상황을 명확히 알리지 않아 인지가 늦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소방당국은 “현장 진입 어렵다”, “환자 이송 어렵다” 등을 알리며 수차례 긴급요청을 했다고 맞섰다.

경찰·소방·의료팀을 총체적으로 지휘했어야 할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중대본은 참사 발생 4시간 만인 30일 새벽 2시 30분에 꾸려졌다. 용혜인 의원실은 “재난안전법에 따르면 당시 중수본·중대본을 구성할 의무는 행정안전부에 있었고,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중수본부장 혹은 중대본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고 지적한다. 이상민 장관은 국정조사 당시 “재난 현장 수습은 소방서장(긴급구조통제단장)이 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컨트롤타워 부재’의 책임 소재조차 매듭짓지 못한 채 국정조사가 끝났다.

뭉뚱그려진 죽음

최정주씨는 마지막 호흡의 순간이 각기 달랐을 희생자들을, 마치 한순간 동시에 없어진 것처럼 다루려 하는 관료들의 태도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156명의 아이가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습니다.’ 국가애도기간 동안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이렇게 뭉뚱그려졌더군요. 사람들은 그냥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 했겠지요.”

‘뭉뚱그려진 죽음’은 잊히기 쉽다. 경찰 특수수사본부의 수사결과 발표, 국회 국정조사는 최씨의 합당한 의문에 답을 주지 못했음에도 “이제 다 끝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추상적 죽음’으로 다뤄질수록, 진영논리에 휩쓸리기도 쉬웠다. 극우세력은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녹사평역 분향소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성탄미사를 하고 있었어요. 신자유연대에서 댄스음악을 틀어놓고 유족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오늘 이곳 녹사평역 광장의 모습이 지금의 한국’이라고요. 자식이 죽은 이유를 알고 싶다는 유족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인 거죠.”

참사가 빨리 잊히길 바라는 이들을 보며 아버지는 딸의 이야기를 그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희생자가 나의 가족이었을 수도 있다’는 감각을 깨우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떠난 딸이 손에 만져지는 누군가였다는 것을 얘기해야 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최유진씨는 학창시절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 최정주씨 제공

제 딸 유진이는요

아빠가 기억하는 유진씨는 자신의 판단을 믿는 독립심 강한 청년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아빠가 딸에게 붙여준 ‘호’는 ‘내가 왜’. 별생각 없이 지시했다가는 “내가 왜 해야 하는지를 알려달라”는 딸의 물음과 맞닥뜨려야 했다. 대신 무엇이든 납득이 되면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얘는 우리랑 다른 것 같아.” 외동딸을 두고 부부는 이런 얘기를 곧잘 나눴다. 최정주씨는 당찬 딸이 자랑스러웠다.

제주도의 국제학교에 다닌 유진씨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2년간은 반장 역할인 ‘악장’을 맡아 단원들을 이끌었다. “유진이가 악장을 맡을 차례가 됐는데, 선생님이 아무 말이 없더래요. 그때 선생님을 찾아가서 물었다고 해요. 나는 준비가 됐는데 왜 시키지 않는지를요. 선생님은 약속을 어겼음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대요.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를 직접 부딪쳐 확인하는 과정을 일찍부터 겪어냈던 것 같아요.”

유진씨는 명문 예술대로 알려진 미국 뉴욕대 티시(Tisch) 예술학부에 합격했지만, 코로나19로 유학을 미뤘다. 그때 유진씨는 잠시 부모로부터 독립해 싱어송라이터로 살아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태원에 자그마한 작업실을 얻었고, 지난해 5월 첫 곡 ‘LOVE ME RIGHT’를 내놨다.

누구나 그렇듯 유진씨의 삶도 특별하면서도 평범했다. “자기 방문을 함부로 못 열게 하고, 청소도 잘 안 하는” 면도 있었고, “필요하면 아르바이트도 하고, 친구들과 여행도 많이 다니는 아이”였다. 5년 전엔 “나만 없어 고양이” 하소연을 하다 엄마·아빠를 설득해 집사가 됐다. 두 고양이를 유진이의 동생이라 여기는 아빠는, 이들마저 자신을 떠날 그날이 두렵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최유진씨의 어린시절. 최정주씨 제공

“우리 아이, 잊으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우리 곁에서 열심히 살아가던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러가는 사회가 정상인가요. 저는 유진이가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제대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제대로 기억하려면, 살릴 수도 있었던 생명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최정주씨의 관심은 온통 지난 4월 20일 야 4당이 발의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쏠려 있다.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살릴 수도 있었던 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과제다. 그리고 그 과제는, 9년 전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 기성세대가 함께 져야 할 몫이기도 하다.

아빠는 오늘도 딸의 휴대폰을 매만진다. 자신이 매일같이 보내는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하늘에 있는 딸에게 조금이라도 닿기를 기도하면서.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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