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한국영화, 또 볼 수 있을까…괴상하고 사랑스러운 ‘킬링 로맨스’ [씨네마진국]
문화부 기자가 되면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볼 줄 알았다. 시사회로 발레나 뮤지컬 공연을 보고 나올 때만 해도 이렇게 행복한 취재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시사 이슈와 엮어 영화를 소개하는 칼럼을 쓰겠다고 나선 뒤로 마음은 다시 무거워졌다. 강남 한복판에서 마약과 납치 살해 사건이 일어나고, 중학생이 흉기 난동을 벌인 뒤 투신하고, 소위 '신대방팸'이라 불리는 일당들이 취약한 10대 여성들을 착취하고, 이렇게 흉흉한 소식만 전해지는 사회면 기사들을 어떻게 영화로 풀어낸단 말인가. 붕괴된 사회의 흉흉함이 짙게 깔린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 '가출팸'의 실상을 생생히 담은 '박화영'? 정치면 기사들은 또 어떤가. 어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면 마음속으로 'GG'('굿 게임'의 약어로 게임에서 패배를 인정할 때 쓰는 말)를 외치며 펑크를 냈다. 지난주가 그랬다.
이번 주마저 펑크를 낼 순 없었다. 그렇다고 자꾸 무거운 영화들만 소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는 세상을 보는 창이기도 하지만 즐거운 도피처이기도 하니까. 마침 최근에 사랑에 빠진 영화가 있다. 어느 면 기사를 펼쳐도 마음이 답답해지고 울화가 치미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모든 걸 잊고 극장에서 내내 웃기만 하다 나오는 경험은 얼마나 소중한가. 32년 일생에서 단 한 번도 한국 코미디 영화를 좋아해 본 적 없는데, 이 영화는 달랐다. 도저히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를 자랑하며 '최악' 아니면 '최고'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고 있는, 이원석 감독의 영화 '킬링 로맨스'다.
'킬링 로맨스'는 이선균, 이하늬 두 선남선녀 배우가 적당히 망가지며 웃음을 선사하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작품이 워너 브러더스라는 대기업에서 투자를 받았지?' 경탄할 만큼 황당하다. 어느 정도냐고? 영화 속에선 타조가 하늘을 난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날아다닌다. 도대체 어쩌다가 타조가 나오느냐고 묻지 마시라. 그냥 날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깊은 감정을 소화하는 것도 타조의 몫이다.아프리카에 대한 동경과 터전을 잃은 슬픔, 갑자기 닥친 비극에 스스로를 다잡는 긍지까지, 가장 진한 '페이소스'를 자랑한다.
하늘 나는 타조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도 '킬링 로맨스'를 사랑할 수 있다. '왜 내가 내 돈 내고 이 위험한 기구에 올라 무서워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지워야 롤러코스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한번 이 영화의 독특한 리듬과 뻔뻔함에 올라타면 영화는 억지 감동이나 메시지 없이 그야말로 끝까지 간다. 그러면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화장실 유머나 외모 비하, 성차별 등에 근거해 웃기는 법이 없다. 시종일관 가볍지만, 그만큼 발랄하고 산뜻하다. 유머의 원천을 하도 온갖 곳에서 찾은 덕분에 '자꾸만 실패하는 아내의 남편 살해 시도'라는 개그에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어이없는 타이밍마다 H.O.T.의 '행복'과 비의 '레이니즘'을 개사한 노래가 울려 퍼지며 흥을 돋우는 건 덤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 '레이니즘' 원곡을 다시 들어봤다. 극장에서처럼 신이 나질 않았다. 역시 영화가 가진 마력이란….
안타까운 건 앞으로 한국 영화에서 '킬링 로맨스' 같은 작품을 다시 찾아보기 힘들 거라는 사실이다.
극장 요금 상승과 대작들의 잇따른 흥행 실패, 그리고 OTT라는 미디어 공룡을 만난 한국 영화는 신규 투자를 바짝 줄였다. 이대로라면 '킬링 로맨스'는 이명세 감독의 1988년 작 '개그맨'부터 2006년 '다세포 소녀', 2008년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등, 나름대로 계보를 가진 한국의 난센스 코미디 영화의 마지막 작품이 될 예정이다. 모두가 좋아할 작품이란 건 분명 아니지만, '킬링 로맨스' 같은 시도가 완전히 사라진 한국 영화계는 훨씬 더 지루하고 특색 없는 모습이 아닐까. 주연 이하늬는 "한국 영화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이 시점에 정확한 좌표를 찍을 만한 영화"라고 작품의 가치를 설명했다. '한땐 그런 작품도 있었지', 하고 뒤늦게 아쉬워하는 일 없도록, 이 영화가 더욱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푸른 기자 (strongbl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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