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성폭행을 했습니다”...피해자는 극단선택, 가해자 할머니 선택은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3. 4. 30. 06:39
[씨네프레소-77] 영화 ‘시’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느 날 66세의 미자(윤정희)는 손자 종욱(이다윗)에게 말한다. 자기가 가장 행복할 때는 종욱이 입에 밥이 들어갈 때라고. 먹는다는 건 삶을 지속하는 행위다. 누군가가 삶을 이어가는 걸 보며 행복해지니, 종욱은 미자가 살아가는 이유다.
종욱이 없는 곳에서 요즘 미자는 분주하다. 500만원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학생 손자는 친구들과 함께 수개월에 거쳐 동급생을 성폭행했다. 상처받은 동급생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가해자 학부모들이 피해자 엄마와 합의하기 위해 총 3000만원 마련에 나섰고, 500만원은 종욱의 몫이다.
‘시’(2010)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간극을 그렸다. 내겐 살아갈 이유인 손자가 누군가에겐 목숨을 스스로 끊을 이유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시를 한 번만 써보고 싶은 미자를 내세워 인생의 모순에 접근한다. 자기에겐 아름다운 것이 남에겐 추악하게 보이는 이유를 들여다보려 한다.
귀여웠던 손자가 성폭행범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자. 미자와 종욱은 허름한 집에서 둘이 살아간다. 종욱의 엄마, 그러니깐 미자의 딸이 이혼 후 미자에게 자식을 맡겼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중학생이 자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자는 죽음의 원인에 손자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생활보호대상자인 미자는 종욱 몫의 합의금인 5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지만, 손자에겐 그의 범행 사실을 안다는 걸 내색하지 않는다.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손자의 입으로 범죄가 사실이라고 확인해주는 순간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미자는 오랫동안 손자에게 범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남에게 들은 소문으로 남겨두려 한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작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을 웃게 했던 손자였다. 어떻게 그가 존재만으로도 남을 죽고 싶게 할 만큼 끔찍한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존재만으로 환영받다가 점점 세상의 냉대에 노출되는 인생
다른 한 편에서 미자는 시를 쓰려 분투한다. 오랫동안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생하던 그녀는 자기 인생의 첫 기억과 마주한다. 자신의 언니가 어린 미자를 부르는 모습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미자는 그때도 언니가 자신을 정말 예뻐한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물 흘린다. 지금은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딸, 할머니의 관심을 귀찮아 하는 손자, 파출부로 일하는 자신을 음흉한 눈빛으로 보는 집주인, 누구도 그녀를 존재 자체로 아껴주지 않는다.
어릴 땐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사람들 품속에서 포근히 지내다가, 나이가 들면 세상의 냉대와 마주하는 게 인생이리라. 미자가 피해자 학생을 진정으로 가엾게 여기게 되는 건 바로 이 지점인 듯하다. 피해자는 여전히 따뜻하게 안겨 있어야 할 어릴 시절, 세상의 가혹한 민낯을 보게 된 것이다. 손자는 피해자에게 소중한 것을 앗아갔다. 그러고도 여전히 잘 먹고, 잘 놀고, 늦잠을 자는 손자를 보고 미자는 결심한다. 피해자 가족에게 합의금도 주고, 손자는 처벌받게 하겠다고 말이다. 누구도 모르게 경찰에게 범행을 알린다.
손자를 씻기고, 먹이고, 발톱을 깎아주고, 처벌받게 했다
미자는 시를 쓰려고 애쓰던 도중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됐다. 차디찬 강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아픔을 공감하게 됐다. 손자의 미래가 망가지는 건 진학과 취직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가 아닌, 남의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 하게 될 때다. 미자는 피해자와 손자,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를 처벌받게 한다.
형사가 종욱을 경찰서로 데려가기 전 미자는 종욱을 씻긴다. 피자를 먹이고 발톱을 깎아준다. 미자에게 종욱을 처벌받게 하는 건 그를 씻기고 먹이고 깨끗하게 하는 것의 연장선상이다. 손자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주는 것은 사랑이다. 손자가 고통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다가서게 되길 미자는 바란다.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윤정희 배우의 유작이다. 평생을 살며 배우가 느껴온 모든 감정의 결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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