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으면 받고, 없으면 못 받는 '재난적 의료비' 허점
건보공단 패소…법원 "지원법 입법 취지 정면 위배"
(광주=뉴스1) 최성국 기자 = 병원비 감당이 불가능한 기초생활수급자 등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재난적 의료비' 제도에 허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돈이 없는 환자 유족에게 '병원비를 먼저 내야 의료비 지원이 가능하다'며 재난적 의료비 지원을 거절한 것을 두고 법원은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지원을 못 받을 수 있어 입법 취지에 정면 위배된다"는 지적까지 내놨다.
광주지법 행정1부(재판장 박상현)는 A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재난적 의료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30일 밝혔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환자가 병원비를 먼저 내지 않으면 정부의 의료비 지원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건보공단의 규정은 부적절하다는 취지다.
상황은 이렇다.
기초생활수급자인 B씨는 뇌졸증으로 지난 2019년부터 약 2년간 광주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고, 끝내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B씨의 유족인 A씨 또한 2년간 쌓인 병원비 2700여만원을 감당하지 못했다. A씨는 환자 사망 책임 소재를 두고 병원과 민사소송까지 벌이게 됐다.
이같은 소식을 들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전남지부와 광주 서구청은 A씨 대신 총 900만원을 병원 측에 지원하기도 했다.
지자체와 지역사회의 도움에도 병원비를 다 낼 수 없던 A씨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찾아가 재난적 의료비를 신청을 하며 '민사소송이 확정된 이후 재난적 의료비가 지급될 수 있도록 지급 신청기한을 유예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는 고액의 수술이나 치료비 등 소득에 비해 '과도한 의료비 지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기초수급자, 차상위계층, 장애인연금 수급자, 장애아동 등에 대해 '재난적 의료비'를 지원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통상적으로 가구의 정기적 소득 대비 의료비가 10% 이상일 경우를 재난적 의료비 지출로 본다.
문제는 이 '지출'이란 단어의 해석을 두고 발생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A씨나 B씨가 병원에 실제로 납부한 의료비가 현재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의료비 지원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즉 병원에 의료비는 지급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실질 지출'이 이뤄진 적이 없기에 의료비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건보공단은 해당 규정이 지원대상이 지원금을 받아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병원과 함께 고의로 과도한 지원비를 받아내는 일 등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로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의 손을 들어주며 '재난적 의료비 지출'의 의미를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건보공단의 주장대로 '지출'의 개념을 의료기관에 의료비를 납부한 경우로만 한정해 해석한다면, 의료비 일부를 당장 납부할 여력이 있는 사람은 건보공단으로부터 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고, 그보다 경제적 사정이 열악한 사람은 의료비를 실제 납부하지 못해 오히려 의료비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특히 재판부는 "건보공단의 한정 해석을 따르면 A씨는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의료비를 병원에 먼저 납부해 민사소송을 포기하게 되는 매우 불합리한 결과가 발생한다"며 "이는 지나치게 가혹할 뿐만 아니라 재난적 의료비 지원법의 입법 취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또 "지원법의 입법 취지는 과도한 의료비로 어려움을 겪는 경제적·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의료 접근성을 보장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것에 있다"면서 "이같은 사례가 지원대상자, 병원 등의 일탈행위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해도, 이는 법령 정비를 통해 해결해야할 문제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원법이 규정하는 '지출'은 지원대상자가 의료기관 등에 실제로 의료비를 납부한 경우는 물론이고, 의료기관 등에 납부할 의료비 지급채무는 확정됐지만 아직 납부를 하지 못한 경우, 의료비 소송이 진행돼 이후에 납부 의료비가 확정되는 경우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star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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