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와 부탄가스는 어떻게 필로폰과 펜타닐이 되었나 [임명묵의 MZ학 개론]
대책 위해 ‘빅브러더의 눈’ 확장 요구될 수도
(시사저널=임명묵 작가)
현재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새로운 화두가 있다면 단연코 마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월에는 14세 중학생이 친구 두 명과 함께 필로폰을 주문하고 투약했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마약 유통이 10대, 그것도 중학생 수준까지 내려왔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최근 들려오는 각종 '흉흉한' 마약범죄 뉴스들의 일부일 따름이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하수처리장 57곳을 검사해 봤는데 검사 대상 모든 곳에서 필로폰 성분이 검출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약 효과를 노리는 처방 약물 오·남용 문제도 빠질 수 없다. 상대적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향정신성 약물인 ADHD 치료제나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은 후 해당 약물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3월에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도 난폭운전 사건도 운전자인 20대 여성이 식욕억제제를 과다 복용한 후 환각을 겪은 결과 벌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전방위적인 마약 확산 흐름 속에서 특히 충격적인 것은 10대 마약 사범 비율이 급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검거된 마약 사범 중에서 10대 비중은 무려 세 배로 높아졌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기세인 셈이다.
텔레그램·비트코인, 마약범죄 핵심 매개체
연예계나 사회의 깊숙한 음지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인식되던 마약이 사회 전방위적으로, 그것도 10대에게까지 확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에 대해 전임 민주당 정권의 사법행정을 문제 삼았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검수완박 등을 거치면서 검찰 조직의 권한이 축소되었고, 그 과정에서 마약 전담 부서들이 다른 곳과 통폐합되면서 검찰의 전문적인 마약 수사 역량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설명과 비판에 분명 타당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고 있는 마약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를 고려하면, 설령 '검찰 개혁'을 진행한다 하더라도 마약 대처 역량만큼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책임론'은 현재 진행 중인 사태의 한 부분만을 설명한다. 사실 한국에서 마약은 그 전에도 이미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요컨대 검찰의 마약 대처 능력이 약해진 것은 마약이 사회 전반적으로 퍼지고 있는 기존의 추세를 좀 더 가파르게 만든 것일 뿐이다. 마약 문제를 더욱 깊이 논의하기 위해서는 왜 한국인들이, 특히 청소년과 청년층에서 갑자기 마약 수요가 늘어났는지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청소년들의 일탈로서 환각물질 섭취는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1980년대나 1990년대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에는 본드와 부탄가스가 있었다. 주로 부모와 학교, 지역사회 네트워크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비행 청소년은 자신들의 '아지트'에 모여 환각물질을 흡입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2000년대부터는 다행스럽게도 본드와 부탄가스는 문제의식을 느낀 국가와 당국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시사하고 있다. 일탈 청소년과 청년이 사회적으로 더 자율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주류사회의 권위가 느슨해졌을 때 언제든지 환각물질이 그들의 네트워크로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의 문제는 '종목'이 본드와 부탄가스에서 필로폰, 펜타닐 등으로 바뀌었다는 것에 있다.
'종목의 변화'에는 세계화가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은 분단으로 인해 사실상의 섬나라이고, 내부적으로 강력한 행정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공급책들이 마약을 자체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세계화 시대를 맞아 한국이 세계로 나가고, 세계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강력한 마약들의 공급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중국 경제의 팽창은 중국계 범죄조직의 규모와 활동 범위를 크게 늘렸고, 그중에는 한국으로의 마약 판매도 있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마약상들도 국내로 들어온 이주민 네트워크를 통해 계속 마약을 들여오고 있다. 그 전에는 위험하고 비싼 것으로 생각되었던 마약이 공급이 늘어나면서 값이 싸지고, '해볼 만한 것'이 돼버린 것이다. 문화적 세계화도 일정 정도 영향이 있었다. 마약과 불가분의 관계인 미국의 힙합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마약에 대한 인식이 더 일상적이고 가벼운 방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양지의 단단한 연결망 복원하는 것이 해법
세계화와 동시에 인터넷의 확산은 마약 유통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국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쉬운 음지의 인터넷이 중요했다. 텔레그램과 비트코인은 근래 마약범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데, 각각 정부로부터 감시받지 않는 의사소통 수단과 정부의 인증을 거치지 않는 자유로운 화폐라는 점에서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찬사를 받던 아이템들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감시망을 벗어난 의사소통 수단과 교환 매개를 가장 잘 사용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는 마약상이었다.
종합했을 때 최근 급속도로 퍼지는 마약은 지난 10여 년간 세계적으로 일어난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학교·직장 등 한국 사회의 전통적 집단의 권위가 빠르게 해체되고, 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율적 영역이 성장했다. 한국 사회의 주류적 논의는 전통적 권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음지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제적 연결망을 통해 각종 강도 높은 마약이 저렴하게 유입되자 마약청정국 한국은 순식간에 마약과 전쟁을 해야 하는 나라로 바뀌게 되었다. 지난 정권에서 국가의 마약 대처 능력을 약화시켰던 때가 바로 이런 변화들에 가속도가 붙던 시점이었던 점은, 한국 사회가 마약을 비롯해 사회 하부에서 생기고 있는 커다란 변화에 몹시 무감각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는 마약과의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근본적으로는 온라인 음지의 범죄 네트워크로 사람들이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양지의 단단한 연결망을 복원하는 일이 해결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해결책이 실제 실현 가능할지, 또 가능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다. 시급한 마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엔 '빅브러더'(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비롯된 용어로 보호적 감시 또는 사회 통제의 수단)의 눈을 더욱 확장시키는 길이 요구될 것이다. 음지가 더욱 깊어지는 와중에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빅브러더의 눈길도 더욱 깊은 곳까지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강화된 빅브러더를 우리는 현명하게 통제할 수 있는가?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가는 마약의 물결 속에서 국가의 힘에 관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한 논의의 필요성은 점점 절실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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