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계에 넘실대는 일본 콘텐츠 J웨이브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언제부터인가 소셜미디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두 일본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어눌한 한국어 말투에 일본 호스트 출신 예능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다나카상'이고, 다른 사람은 오사카 부동산 회사에 근무하며 유튜브 채널에서 한국어로 오사카의 각종 맛집을 소개하는 '마츠다 부장'이다.
사실 다나카상은 한국 개그맨 김경욱으로, 의상을 차려입고 일본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다. 어눌한 한국어는 설정일 뿐이다. 반면 마츠다 부장은 너무도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해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밝혔을 때 시청자들 사이에 놀랍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는 혼혈이며 학창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 정서적으로도 한일 양국의 중간지대에 있다. 최근 두 남자는 여세를 몰아 유튜브를 넘어 정규 편성 TV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코로나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한국인 관광객의 일본행과 더불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일본 대중문화의 자연스러운 유입 양상을 보여준다.
올 상반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447만 명을 동원했고, 《스즈메의 문단속》(감독 신카이 마코토)은 이를 넘어 500만을 향해 가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 기간에 개봉해 215만 명을 동원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까지 합하면 그 기세는 대단하다.
최근 한국 영화가 부진의 늪에 빠진 가운데 나온 상대적인 결과이기도 해서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시장에서도 흥행을 이뤄내는 콘텐츠의 힘을 가졌다. 여기에 지난해 개봉한 실사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일명 '오세이사')도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무대에 등장한 일본 원작 작품들
무대 공연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직수입 형태보다는 라이선스를 통한 로컬 공연화가 이뤄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공교롭게도 지난 한 해 가장 인기 있었던 라이선스 대극장 뮤지컬도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오바 쓰구미가 스토리를, 오바타 다케시가 작화를 담당하고, 주간 소년 점프에서 2004~06년 연재된 동명의 인기 만화 《데스노트》다. 2015년 일본 호리프로가 처음 무대 뮤지컬로 제작한 《데스노트》는 국내에서 일본 신국립극장 예술감독 구리야마 다미야가 지휘한 두 번의 공연을 거쳐 2022년 세 번째 시즌부터는 오디뮤지컬컴퍼니와 김동연 연출가가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재탄생시켜 큰 인기를 끌었고 2023년 4월 현재 앙코르 공연이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2012년 《엘리자벳》 초연을 시작으로 유럽 왕정 배경과 왕가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붐이 시작됐다. 1992년에 비엔나 극장 협회에서 제작한 이 작품은 한국 초연에 앞서 일본의 라이선스 시도가 있었다. 일본은 이미 1996년에 이 작품을 전원 여성 연기자로만 구성된 가극단 다카라즈카 제작으로 초연해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 세 차례(2014, 2019, 2021년) 공연된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2006년 일본의 엔도 슈사쿠의 소설을 원작으로 처음 만들어졌고 일본 뮤지컬로는 최초로 유럽에 진출한 작품이다.
일본은 서양 배경의 콘텐츠를 자국에서 제작하고 이를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권역은 물론이고 서양에 역수출하는 작품을 많이 만들어왔다. 마리 앙투아네트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인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1972~73년 출간돼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TV 애니메이션으로 시청한 중년들에게는 추억의 작품이기도 하다. 다카라즈카에서도 이미 1974년 고정 레퍼토리 뮤지컬로 자주 공연해 5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그리고 같은 원작을 새롭게 각색한 한국 뮤지컬이 준비 중이다. 우리나라 제작사 EMK는 만화 출판사 슈에이샤와 뮤지컬 각색 협약을 맺고 창작진을 투입해 올겨울 한국 초연을 준비 중이다.
일본 영화를 원작으로 한 새로운 창작뮤지컬도 올겨울 초연을 앞두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제작하고 스나다 마미 감독이 연출한 《엔딩노트》(2011)를 한국 창작진과 제작진이 의기투합해 각색한 동명의 뮤지컬이다. 원작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주인공이 자신의 엔딩노트를 만들어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은 작품이다.
영국 휩쓴 일본 애니메이션 원작 뮤지컬
그런가 하면 지난해 런던에서 초연돼 얼마 전 영국 연극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최우수작품상, 연출상, 의상디자인상 등 최다 6개 부문을 수상한 연극 《이웃집 토토로》(My Neighbor Totoro) 역시 일본 원작 콘텐츠의 저력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영국의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가 일본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을 연극으로 각색해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지난해 10월 선보여 찬사를 받았다.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988년 각본·감독을 맡은 원작은 어머니의 요양을 위해 시골의 할머니 집에 맡겨진 어린 두 자매가 숲에서 신비로운 생명체 토토로를 만나 신기한 고양이 버스에 탑승하는 등 모험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RSC, 스튜디오 지브리, 영국 극단 임프로버블, 일본 닛폰TV가 공동 제작을 맡았고 영국 극작가와 연출가가 참여해 영어로 공연했다. 배우들도 대부분 일본계 현지 배우들이 캐스팅됐다. 아이와 성인이 함께 볼 수 있는 가족 드라마를 원했던 RSC와 다수의 우수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지브리 스튜디오 간에 협업을 이룬 것이다. 원작의 작곡가 히사이시 조는 무대 버전에서도 음악을 제공하고 제작 프로듀서로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작업이 일본 원작으로 세계적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임을 강조했다.
한국의 K팝과 K드라마는 코로나19 시기에도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이제 J웨이브가 몰려오면서 한일 양국의 Z세대 사이에는 서로에게 콘텐츠를 제공하는 문화예술 공동 마켓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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