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137년 전 요구가 지금도 유효한 어떤 현실 - 하루 8시간 노동
노동절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헤이마켓 사건 당시 노동자들이 불렀던 노래다.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시위가 헤이마켓 광장에서 일어났는데, 이 사건이 노동절의 유래가 됐다. 150년 뒤인 한국, 정부는 최대 주 69시간까지 근로시간을 유연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오늘 한국에서 하루 8시간씩 주 5일, 주 40시간만 일하는 노동자 얼마나 있을까. 150년 전 노동절이 만들어질 당시의 주장이 여전히 한국에서도 유효한 건 아이러니하다.
1886년 미국에서 일어난 시위를 계기로 시작된 노동절이 세계적인 노동자들의 행사가 된 건 1889년이다. 이 해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이었는데, 20여 개국의 사회주의 운동가와 노조 대표자 등이 '제2인터내셔널'을 결성하고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삼아 헤이마켓 사건을 기념하기로 했다. 1890년 각국에서 열린 첫 메이데이 이후 지금까지 노동절은 이어져오고 있다.
'외국 행사'였던 노동절, 언제 한국에 들어왔나
1923년 첫 메이데이 시위는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문화통치를 하던 일제 치하에서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부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사를 보면 메이데이에 화가 난 한국 노동자들이 일본인 농장주를 두들겨 패는 사건도 있었다. 노동자와 관리자의 관계에 더해 억압받는 한국인과 탄압하는 일본인의 구도까지 겹쳐져 분노가 쌓였던 것으로 보인다.
메이데이 시위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른 모습을 보면 당시 3.1 운동의 여파와 민족주의가 노동운동과 겹쳐진 것을 엿볼 수 있다. 서울에서는 노동자들이 장충단에 모여 행진을 하려 했는데, 경찰이 금지했던 모습도 나왔다.
1923.04.27. 동아일보 –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오는 5월 1일은 전 세계 노동자가 다 같이 기념하는 노동기념일이라..(중략)..그날은 각 공장 노동자가 모두 휴업하고 시위행렬을 하되 먼저 장충단공원으로 모여 그날 오전 열 시에 시간단축, 임금증액, 실업방지 등 안건을 결의하고 기를 두르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가에 행렬을 하려 하였더니 종로경찰서에서는 "상부에서 명령이 있어 그날 만일 시위 행렬을 하면 절대로 금지할 터인데"
1923.05.12. 조선일보
전남 영광 노동자 수십 명이 농장 주임 길촌이라는 일본사람을 난타하여 일시대소동이 일어났던바, 경관이 칼까지 빼어 진압하였다는데 전말을 자세히 들은즉 그날은 메이데이 기념일인고로 그날을 이용하여 영광 노동우애회 정기총회를 진행한 후..(중략)
1923.05.12. 조선일보
지난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념 축하하기 위하여 운동장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렬을 지어 두루 돌아다니면서 만세 만세를 부르는 소리는 과거 사 년 전(1919년 3.1 운동)의 만세 소리를 다시 느끼게 되었으며 경관은 이를 제지하고자 수백 군중 속에서 일곱 명을 인치하고 목포 경찰서로 응원을 청한 바..(중략)
당시 기사를 분석해 보면, 노동절 시위는 1923년 한반도에서 처음 열린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조명을 받다가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일제의 민족말살 통치시기와 미군정, 독재를 거치며 노동절은 탄압을 받아 크게 열리지 않거나 언론에서 지워졌다.
그러다 1989년 민주화 직후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시위는 터져 나오게 된다. 아래에 '메이데이' 관련 기사 숫자를 보면 대략적인 노동절의 성쇠를 알 수 있다.
이름도 날짜도 빼앗긴 노동절
하지만 전평은 폭력화를 이유로 1948년부터 노동절 행사가 금지됐고, 정부가 선택한 어용노조였던 대한노총만 노동절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노동절은 날짜를 잃었다. 1957년에는 노동절의 날짜를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바꿨다. 5월 1일 같은 날에 각국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여 연대를 확인하는 국제적인 노동자 운동과 한국의 노동절을 단절시키려는 목적이 뚜렷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노동절은 이름을 빼앗겼다. 이전까지 메이데이나 노동절로 불렸던 걸 1963년부터는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바꿨다.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라는 명칭에는 근면성실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가치관이 투영됐다. 스스로 단결하고 투쟁해서 주체적으로 사회를 바꿔내는 사회주의의 노동자상과 단절하려는 의도도 담겼다.
민주화 직후 노동자대투쟁과 함께 노동절 행사는 대규모로 열렸다. 노동계는 독재정권 시기 잃어버렸던 노동절의 날짜와 이름 되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문민정부에서도 노동절은 환영받지 못했다.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5월 1일 노동절'로 되돌리자는 노동계의 요구에도 정부는 5월 1일을 '법의 날'로 지정했다. 미국이 냉전시기에 사회주의 진영의 노동절과 단절하기 위해 메이데이를 법의 날로 지정했는데 이를 한국 정부도 가져온 것이다.
노동절은 미국 시카고에서 처음 시위가 시작됐는데 정작 미국은 반사회주의로 인해 노동절을 지우려 애썼고,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도 이를 똑같이 받아들인 것이다.
'놀토'에서 주 4일제까지 : 근로시간 단축의 역사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법으로 하루 8시간 노동을 규정했다. 1953년 근로기준법을 만들면서 1일 8시간 주 6일 근무, 총 48시간 근무라는 법정근로시간이 법으로 명문화됐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경제성장기와 맞물린 독재정권 시기에는 법이 유명무실했다. 1970년에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민주화와 함께 1989년에는 주 44시간으로 법정근로시간이 단축됐고, 근로기준법도 현실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2000년 들어서는 김대중 정부에서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 주 5일제, 주 40시간 근무 도입을 공식화했다.
주 5일제 적용범위를 단계적으로 늘려나갔는데, 모든 기업이 매주 토요일을 쉴 수 있게 된 건 2012년에야 안착됐다. 그전에는 상당수 기업들이 격주 토요일을 쉬고 나머지는 근무를 해서 '놀토'(노는 토요일)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법으로 정한 최대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지만, 12시간까지 연장근로가 가능하다. 이 연장근로의 기준을 두고 계속 논란이 있었다. 일주일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해석에 따라 평일에 연장근로 12시간과 주말에 추가로 16시간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주 40시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68시간까지 가능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입법을 통해 해석을 바로잡고 '주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최대 주 52시간'을 정리하면서 주 52시간제가 도입됐다.
이번 정부 들어서는 지난 정부의 주 52시간제를 유연화해 최대 69시간까지 몰아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시도가 있었다. 야당은 정부의 이런 정책에 반대목소리를 내며, 민주당은 주 4.5일제, 정의당은 주 4일제 등 근로시간 단축 주장을 이어오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은 과로와 초과근무가 건강을 해치고, 사회적으로도 노동력 재생산에 지장을 준다는 문제의식에서 법정근로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여전히 높은 근무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 통계를 보면 한국은 남미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OECD 국가들 중 네 번째로 일을 오래 하는 국가로 꼽혔다.
'8시간 노동'이라는 오랜 꿈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전형우 기자dennoc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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