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성난 사람들(BEEF)》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3. 4. 2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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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참으며 하루를 버틴 당신에게 추천하는 영화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넷플릭스에서 날아든 《성난 사람들(BEEF)》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품고 있을 '화(火)'라는 감정을 정조준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영화인 것처럼 끌고 가더니 그 끝에서 뜻밖의 해방감을 선사하는 고약하게 멋진 영화다. 기막힌 작품을 만나면 주위에 입소문 내고 싶어 안달이 나곤 하는데 이 시리즈가 그렇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며 오늘도 가면을 쓰고 하루를 버틴 당신이라면, 《성난 사람들》 버튼을 누르시라.

웹드라마 《성난 사람들(비프)》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주차장에서 시작된 나비효과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명만 참았다면. 화로 반품에 실패해 화가 잔뜩 난 도급업자 대니(스티븐 연)는 마트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흰색 고급 SUV 차량과 충돌할 뻔한다. 대니에게 돌아온 건 SUV 운전자의 손가락 욕과 신경을 긁는 자동차 경적. 손가락을 치켜든 SUV 차량 주인공은 회사 매각 협상이 어그러져 열받아 있는 에이미(앨리 윙)다. 에이미의 도발에 대니도 참지 않는다. '너, 죽었어'란 마음으로 돌진한다.

그렇게 '화'에서 시작된 신경전은 분노의 추격전으로 돌변하고, 이는 나비효과처럼 커져 복수혈전을 부른다. 상대 집에 찾아가 화장실 오줌 테러를 가하고, 평판에 흠집을 내고, 가정을 파탄 내고, 커리어를 끌어내리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정신'으로 무장한 '유유상종' 남자와 여자는 '막상막하'의 복수를 펼쳐내며 파멸의 길로 돌진한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 무렵, 드라마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커브를 틀며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두 남녀의 처지를 납득시키기 시작한다.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두 사람이 상대에게서 발견한 건, 바로 '자기 자신'. 그러니까 혐오했던 상대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던 셈이다. 이들이 서로를 미치게 할퀸 것도 나와 너무 닮아서인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닮았기에 두 사람은 세상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해줄 수 있는 존재다. 이 지점에서 《성난 사람들》은 진짜 흥미로워진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대니는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재미 한인 2세. 미국에서 성장했지만, 누가 한국 DNA 보유자 아니랄까봐 K장남이 되길 자처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손에 쥔 돈은 없고, 일은 풀리지 않고, 보유한 코인마저 '떡락'한다. 사기를 당해 쫓기듯 한국으로 떠난 부모님을 다시 모셔와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뿐인 백수 동생 폴(영 마지노)에게 형으로서 존경받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로드레이지(Road Rage·보복 운전)'를 계기로 대니와 엮인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 역시 사연은 있다. 노력과 실력으로 자수성가했고 유명 예술가의 아들이자 도예가인 일본인과 결혼한 그녀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듯 보인다. 그러나 타인이 바라보는 그녀의 삶과 그녀 스스로가 느끼는 삶에는 괴리가 크다. 일에 쫓겨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부채감. 작은 고민 하나 공감해 주지 않는 이상주의자 남편에게 느끼는 공허감. 상류사회의 허위 의식을 허허실실 웃으며 대응해 줘야 하는 피로감. 그런데 이를 분출할 곳이 없으니 외롭기만 하다.

'인정'에 목마른 남자 대니와 '애정'이 고픈 여자 에이미. 그렇게 서로가 같은 처지임을 눈치채는 두 사람을 보며 독일 심리학자 로베르토 베츠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 로베르토 베츠는 자신의 저서 《또 제 탓인가요?》에서 이렇게 말했더랬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나를 위해 나타난 내 인생의 천사'라고. 왜 그런가. 분노 버튼을 누르게 한 그는 억누르고 있던 내 감정을 솔직하게 직면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대니와 에이미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두려웠던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상대에게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가면을 벗는 순간만큼은 자유로워진다. 두 사람 관계를 박찬욱 식으로 표현하면,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쯤 되려나. 박진표 식으로는 '너는 내 운명'이라 명명해도 될 것이다.

웹드라마 《성난 사람들(비프)》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웹드라마 《성난 사람들(비프)》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웹드라마 《성난 사람들(비프)》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이제까지 이민자 사회를 이렇게 그린 영화는 없었다

이 작품은 미국 드라마 《데이브》의 대본을 쓴 한국계 미국인 이성진 작가가 실제로 겪은 로드레이지에서 영감을 얻어 출발한 작품이다. 《문라이트》(2016), 《레이디버드》(2017), 《미나리》(2020),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등을 선보이며 품질 보증 제작사로 거듭난 A24가 제작했고, 스티븐 연 외에도 저스틴 민, 에슐리 박, 데이빗 최 등 한인 배우가 대거 출연한다. 한국계 미국인이 대거 뭉친 작품이긴 하지만, 기존에 봐온 이민자 사회 영화들과는 다르다.

그동안 이민자들을 다룬 영화들이 단골로 그려온 건 '정체성 혼란 문제' 혹은 '새로운 땅에서의 고군분투', 그도 아니면 '백인 시선에서 규정된 인종차별'이었다. 《성난 사람들》은 이런 카테고리에 묶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 할리우드 영화 안에서 악당이거나, 주인공 친구이거나, 무술 고수이거나, 끔찍한 공부벌레이거나, 그도 아니면 구두쇠로 그려져온 동양인 캐릭터도 없다. 미국 문화를 흡수하며 자란 인물들에게 인류 보편의 감정인 '분노'라는 버튼을 달아 보편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윗세대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받은 기질을 풀어냄으로써 그만의 특수성도 확보한다.

무엇보다 주연·조연 가리지 않고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입체적인데, '동양인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편견에 가차 없이 일격을 가한다. 백인들의 시선에서 규정돼 왔던 동양인 공식을 비틀어, 동양인 시선에서 백인을 바라본 지점도 흥미롭다. 이를 대변하는 인물은 에이미의 사업 파트너이자 백인 상류층의 허례허식을 상징하는 조던(마리아 벨로). 그녀가 이 드라마에서 퇴장하는 방식은, 그동안 주류 백인 사회 영화들이 동양인을 퇴장시킨 방식을 역으로 보여주는 인상이라 쓴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30분 분량의 에피소드 10개로 구성된 《성난 사람들》은 매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서사가 비상한 작품이다.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물들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사용한 1990년대 음악 선곡은 탁월하고, 유명인들이 남긴 작품 속 문장이나 인터뷰를 인용해 구성한 각 에피소드 제목('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1화), '내 속에 울음이 산다'(3화), '독창적인 선택의 문제'(8화) 등)과 회화는 감각적이다.

특히 칼 융의 "깨달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어두움을 의식하면서 온다"에서 영감받아 만든 마지막 에피소드인 '빛의 형상'은 이성진 작가가 밝혔듯,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한데, 그 완성도가 상당해 보는 내내 헉 소리가 나온다. 최근 몇 년의 최고 엔딩이고, 넷플릭스 해지에 대한 고민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엔딩이며, 용두사미 드라마들이 필사라도 했으면 하는 엔딩이면서, 앞으로 두고두고 소환될 네버-엔딩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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