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파서, 일상의 작은 행복조차 겁났다
죄책감 해소하기
아픈 엄마 홀로 집에 온 뒤
삶의 작은 행복에도 죄책감
엄마와 사소한 일상 공유하며
침울함 떨치려 더 크게 웃기
“아, 에, 이, 오, 우.”
갈색 현관문 앞에 서서 나는 굳은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비틀었다. 푸르르 푸르르르. 입술까지 풀어준 뒤 한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호흡에 따라 어깨가 솟구쳤다가 내려왔다. 이제 미소를 장착할 시간. “개구리 뒷다리~”를 내뱉고 입꼬리를 올렸다. 스스로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났다. 마음과 몸의 준비가 끝나자 현관 비밀번호 6자리를 눌렀다. “엄마, 엄마. 나 왔어.” 나는 호들갑을 떨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결혼하기 전 엄마와 남동생과 7년 동안 함께 산 그 집이다. 그 집에서 조카들은 온 방을 휘저었고, 그 모습을 보며 우리는 웃었다. 4남매와 그 배우자가 모여 화투를 치고, 연말이면 조카를 포함한 가족 열댓명이 각자 5천원짜리 선물을 사서 교환한 곳도 그 집이다. 몇년 전, 엄마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큰조카가 선물로 준비한 양 갈래 머리카락이 땋인 금발 가발을 뽑았더랬다. 엄마에 이어 세 딸, 그리고 그 남편과 자녀들까지 돌아가며 싸구려 가발을 써보고는 우리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 찍힌 사진은 여전히 거실에 걸려 있었다. 그 집은 내게 안온한 연녹색이었다.
그런데 집의 색이 바뀌었다. 지금 그 집은 투명도가 50%쯤 되는 검은색이다. 볕이 안 드나 싶을 정도로 어두웠다. 상황이 달라진 건 엄마가 아프다는 것뿐이었는데, 환자가 내뿜는 고통의 기운은 집 안의 색을 바꿔놓았다. 그 집에서 나는 특별히 뭘 하는 게 없는데도 쉬이 피곤해졌다. 그 어두운 집에서 나와서 내 집으로 돌아오면 몸통을 꽉 조였던 옷을 벗는 기분이었다.
‘영 케어러’ 우울감 7배
응급실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난 아침 9시께, 남동생에게 엄마를 맡기곤 바로 미팅 장소로 향했다. 미처 화장을 지우지 못한 얼굴 위에 또다시 파운데이션을 펴 발랐다. 기름진 머리와 꾀죄죄한 차림이 누가 봐도 외박한 모양새였지만, 코로나19 탓에 얼굴을 가릴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마스크 안에선 자꾸 하품이 났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두잔이나 마셨는데도 잠이 깨지 않았다. 거래처 사람이 업무에 관해 설명하는 흐름을 때때로 놓쳤다. 만족스럽지 않은 미팅을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무릎이 조금 꺾이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나을 수 있을까. 일과 간병을 병행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이런 생활을 몇년이나 계속해야 할까. 아득했다.
1955년생인 엄마는 베이비부머의 시작점이다. 1955~1963년생은 약 700만명, 그 자녀 세대인 1979~1992년생은 약 1천만명이라고 한다. 단순 계산해서 자녀 1.4명이 부모 1명을 돌보는 꼴이다. 2021년 고령자 통계는 2021년 65살 이상 고령 인구가 16.5%로, 2025년엔 20.3%, 2060년엔 43.9%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현재 대부분의 간병 부담을 가족이 지는 걸 고려하면, ‘간병사회’를 맞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부담을 느낄 것이다. 그럼 환자 가족들은 괜찮을까.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 가족들도 우울감을 느낀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2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증 질환이나 장애를 겪는 가족을 돌보는 청년(영 케어러)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청년에 비해 우울감을 느낄 확률이 7배 이상 높다고 한다. 특히 주 돌봄자 청년의 경우엔 우울감 유병률이 70.9%로, 일반 청년보다 8배 이상 높았다.
그래도 힘들다고 말하긴 어렵다. 환자가 더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에 “네가 아픈 엄마보다 힘드냐” “엄마는 너를 수십년간 키웠다” “고작 얼마나 됐다고 힘들다고 하냐”는 말로 자신을 괴롭힌다. 한동안 나는 친구와 수다 떨며 웃을 때, 어쩌다 남편과 데이트할 때,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혼자 먹을 때조차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가 아픈데’라는 문장은 일상에서 찾는 작은 행복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때 나를 위로한 건 나보다 먼저 부모의 투병을 겪은 친구였다. “너도 잘 쉬어야 엄마를 더 잘 돌보지.” 그 말을 핑계 삼아 나는 죄책감을 조금씩 덜어냈다.
어버이날 서프라이즈 이벤트
나는 엄마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같이 따라 하기보다 웃기를 택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행동했다. 하루에 10번가량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엄마, 나 일어났어” “엄마, 나 출근해” “엄마, 나 밥 먹으러 가” “엄마, 나 밥 먹었어” “엄마, 나 이제 퇴근하고 엄마 집으로 가”, 계속 “엄마, 나…”를 반복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큰일 볼 때도 전화한다. “엄마, 나 똥 싸. 근데 안 나와” 이렇게. 엄마는 마흔이 된 큰딸이 걸어오는 돼먹지 못한 농담에 피식하며 웃었다.
그리고 엄마가 아픈 뒤 맞는 첫번째 어버이날, 나와 여동생들은 작당 모의했다. 시작은 둘째 여동생이었다.
“민지 어린이집에서 얼굴에 착용하는 카네이션 화환을 만들었는데, 내가 4개 빌려올 테니까 서프라이즈로 우리가 쓰자.”
“미치겠다. 진짜. ㅋㅋㅋ”
“민지네 반 친구 엄마들한테 전화해서 빌리고 있어. ㅋㅋ”
어버이날 당일 줄곧 침대에 누워 있던 엄마가 겨우 몸을 일으켜 식탁에 앉았다. 엄마가 밥을 먹는 동안, 우리는 방에서 얼굴에 카네이션 화환을 썼다. 화환 문구는 “부모님 사랑해요. 크게 잘될 아이”였다. 나이 많은 이모들과 자기 엄마가 거실 복도에서 카네이션 모형을 머리에 쓰고 입장 타이밍을 기다리자, 중1 남자 조카가 “정말 대~단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드디어 나, 둘째 여동생, 셋째 여동생이 일렬로 등장했다. 밥을 먹던 엄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다가 울음이 터졌다. “엄마, 내년에는 아프지 마! 올해만 아프고 끝이야!” 어깃장 놓듯 큰소리를 내고서야 울컥하는 마음이 겨우 눌러졌다.
사진 속에는 눈물을 닦는 엄마를 앞에 두고 신난 세 자매가 있었다. 마흔이 돼도 철없는 딸은 엄마를 울려놓고도 웃는다.
소소
갑작스레 ‘엄마 돌봄’을 하게 된 케이(K)-장녀가 고령화사회에서 청년이 겪는 부모 돌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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