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빌라 위협하는 전세사기, 아파트 위협하는 역전세

안상우 기자 2023. 4. 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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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發 주거 불안이 역전세를 타고 아파트를 덮친다"


전세사기는 집값 하락 때문이다?!

전세사기를 벌인 임대인들이 재판에 넘겨질 때면 나오는 단골 변명들이 있습니다.

"집값이 이렇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집을 전세로 내놓은 임대인들이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그대로 들고 있다가 2년 뒤 계약 만기 때 돌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집주인 본인의 부채를 해결하거나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데 사용합니다. 대신, 전세 만기가 돌아와 보증금을 돌려줘야 할 때는 새로운 세입자를 들여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즉, 기존 세입자는 새로운 세입자로부터 보증금을 받아서 나가는 것입니다.

부동산 경기가 호황일 때는 거래도 활발하고, 가격도 상승하기 때문에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호황에서 불황으로 시장 분위기가 바뀌면 거래도 줄고 가격도 떨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주기가 어렵습니다. 마지막 수단은 집을 팔아서 나온 매각 대금으로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는 것인데, 이마저도 시장이 불황일 때는 여의치 않습니다.

전세사기꾼들의 이러한 변명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집값이 계속해서 상승했다면 전세사기 범행은 어쩌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전세사기'라고 부르는 행위가 죄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범행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시기가 뒤로 미뤄졌을 뿐, 애초에 보증금을 돌려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집값이 하락하면 탄로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수사 과정에서 수집된 증거들은 '전세사기꾼들이 시장 상황과 별개로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나 의사가 없이 주택을 무분별하게 매입하며 이 과정에서 수수료나 리베이트 등 부당한 재산상의 이득을 챙겼다'고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빌라를 노렸습니다. 아파트와 달리 시세가 불투명한 빌라는 전셋값과 집값이 같은 '깡통 전세'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이용해 빌라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피해자들의 전세보증금만으로 돈 한 푼 없이도 소유 주택을 수백 채, 수천 채까지 증식하며 피해자들을 양산했습니다. 당연히 전세사기꾼들의 변명은 법정에서 통하지 않았습니다.

빌라 위협하는 전세사기, 아파트 위협하는 역전세


빌라와 달리, 아파트는 비교적 시세가 투명합니다. 누구나 인터넷이든 발품을 팔아서든 전셋값과 집값의 차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전세사기꾼들의 레이더에서 아파트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전세사기는 피했지만, 집값 하락은 아파트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매매 가격보다 전세 가격이 더 크게 떨어졌습니다. 한국부동산원이 제공하는 전국 아파트의 전세 실거래가지수를 살펴보면,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지역 모두에서 전세 가격이 상승으로 전환한 건 2019년부터입니다. 특히 임대차 3법이 시행된 2020년 수도권에선 10% 넘는 상승세를 보이며 치솟아 2022년 6월에 전례 없는 고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반년 만에 2년 치 상승세를 까먹더니 지난해 말부터는 2년 전 전세 가격을 밑돌기 시작했습니다.


2년 전보다 전세 가격이 떨어진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세입자 입장에서는 2년 뒤 계약 만기가 돌아올 때 더 낮은 가격에 전세 계약을 다시 맺자고 집주인에 요구할 것입니다.

가령 제가 2021년 5월, 전세보증금 5억 원을 내고 지금 집에 세를 들어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다음 달이면 이제 계약 만기인데, 지난달 옆집은 전세보증금 3억만 내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제 제가 집주인에게 찾아가 나도 전세보증금 3억 원으로 재계약을 하겠다고 요구하면, 집주인은 기존 보증금과의 차액 2억 원은 반드시 돌려줘야 합니다.


이렇게 2년 전 계약 때 받은 전세보증금보다 현재 전세 가격이 더 떨어져 집주인이 보증금 일부를 돌려줘야 하는 상황을 '역전세'라고 부릅니다. 역전세로 인해 집주인이 돌려줘야 하는 차액, 바로 역전세액은 집주인이 온전히 부담해야 합니다. 만약 집주인이 돌려줄 능력이 없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집값 자체가 2년 전 전세 가격보다 더 떨어져서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면 어떨까요? 앞서 예로 돌아가서, 2년 전 전세 계약 때 제가 낸 보증금은 5억 원인데 2년 만에 매매 가격이 5억 원 밑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는 '전세 보증금을 떠안는 조건으로 집도 넘기고 돈도 드리겠습니다.'라며 매수자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요? 네, 실제로 수도권의 대단지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매물의 집주인은 4월 21일 3억 4천만 원에 집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전세보증금 3억 5천만 원이 딸려 있기 때문에 기존 집주인은 새로운 주인에게 1천만 원을 주고, 집도 넘겼습니다.

직접 취재해 보니, 기존 집주인은 다주택자로 세금을 절감하고자 급매물로 내놓은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사례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매우 위험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매물로 여겨진, 그것도 대단지 아파트에서 역전세로 인해 '마이너스 갭 투자' 매물이 나왔다는 건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호입니다.
 

역전세를 폭탄으로 만든 주범 '임대차 3법'

부동산 불황기에 전세 가격이 떨어져 역전세가 발생하는 건 피할 수 없습니다. 급등했던 집값이 시장에서 조정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조정을 거치지 않고 거품이 쌓인다면,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에게 안 좋은 결말로 이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세입자를 보호를 하겠다며 만들어진 '임대차 3법' 때문에 이번 역전세는 다른 때보다 더 위험해졌습니다.

임대차 3법으로 지난 2020년 8월 이후, 세입자는 첫 전세 계약 만기 이후 추가 2년까지(2+2) 전세 계약이 보장되고, 중간에 계약을 갱신할 때도 집주인이 최대 5%까지만 보증금을 올릴 수 있도록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이미 계약 중인 세입자의 경우, 추가 계약기간 2년을 보증금을 최대 5% 이내에서 증액하는 선에서 계약 갱신 권한을 법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갱신 사례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2020년 8월 이전에는 집주인 본인이 살다가 8월 이후에는 세를 내놓고 세입자를 구한다거나 2020년 8월 이후 입주가 시작된 신축 아파트의 주인이 세입자를 구할 땐 신규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입자를 새로 구하는 경우 집주인은 임대차 3법 때문에 앞으로 4년 동안은 보증금을 올릴 수 없으니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에 집을 세놓기 시작했습니다.

임대차 3법이 시행된 2020년 8월 이후 이뤄진 전세 계약 가운데 신규 거래와 갱신 거래 사이에는 엄청난 가격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동일 아파트, 동일 면적에 층수도 비슷했지만 신규 전세 거래는 갱신 전세 거래와 비교해 몇 억이나 많은 전세보증금을 받아낸 것입니다. 이는 집값 변동이 심한 시기에 나타날 수 있는 일반적인 역전세보다 더 위험한 역전세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신규 거래라는 이유로 2년 전에는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한껏 끌어올렸다가 2년 뒤인 지금은 세입자가 지금 시세에 맞는 낮은 가격에 재계약하길 원한다면 역전세는 피할 수 없습니다. 특히, 호황기에 가격 상승폭이 컸던 아파트는 불황기에는 하락폭 역시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폭탄의 위력은 '전세사기 의도'가 전혀 없었던 보통의 집주인도 보증금을 돌려주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역전세 폭탄의 타이머는 이미 시작됐다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함께 서울과 경기, 인천 지역 아파트의 전세 계약 실거래 자료 전체를 분석해 봤습니다. 분석 시기는 수도권 각 지역별로 역전세 조짐이 시작된 2022년 말부터 분석 데이터가 모두 공개된 지난 3월까지입니다.

갱신 거래는 역전세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은 만큼 갱신 거래를 제외한 신규 거래들을 따로 추출해 냈습니다. 그다음 2년 전 최고가 전세 계약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이뤄진 거래 건수를 추려냈습니다.


그 결과, 수도권에서만 2022년 말부터 2023년 3월까지 '역전세 추정 거래'가 4만 4,574건 발생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역전세 추정 거래가 가장 많았던 곳은 경기 지역으로 2만 3,213건이 집계됐습니다. 전체 수도권에서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합니다. 다음은 서울 지역입니다. 1만 5천 건이 넘는 역전세 추정 거래가 발생한 걸로 나타났고, 역전세가 가장 먼저 시작된 인천은 5,774건이 발생했습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범정부 특별 단속으로 정부가 확인한 전세사기 의심 거래는 1만 4천 건 수준입니다. 또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공공 매입하기로 한 물량은 최대 3만 5천 호 수준입니다. 이를 감안하면 불과 3~4개월 사이에 발생한 4만 5천 건에 달하는 역전세 추정 거래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역전세로 집주인이 돌려줘야 할 금액, 역전세액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수준입니다. 아파트 가격이 비싼 서울이 가장 높았는데, 평균 1억 7천만 원 넘는 돈을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했던 걸로 나타났습니다. 인천과 경기도 각각 평균 역전세액이 1억 원을 넘었습니다.

지난 3월 인천 지역의 아파트 중위 가격이 3억 5,533만 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수도권 지역의 평균 역전세액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닌데요(KB 국민은행 기준 시세). 집주인이 이 돈을 돌려주지 못했다면, 이젠 아파트에서도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잇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트 보증 사고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이런 우려를 반영하듯 아파트의 보증 사고 건수는 폭등하고 있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 HUG가 집계한 올해 1분기 전국 아파트의 전세보증사고는 791건에 달합니다. 지난 1년 동안 전체 1,073건이 발생했던 점을 고려하면 브레이크 없는 엄청난 증가세입니다.


역전세난이 심각해진다는 것은 당장 급전을 구하지 못하면 '개인 부도'에 빠질 수 있는 집주인과 이런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주거 불안을 느끼는 세입자가 점점 늘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역전세를 벗어나기 위해 집을 급매물로 내놓는 집주인이 늘어날 경우, 이는 부동산 가격 하락을 부추길 수 있고 연쇄적으로 부동산 경기 침체를 초래해 악순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전세 폭탄은 언제 터질까요? 어쩌면 이미 시작된 것일까요? 이를 예측하고 진단하기 위해 제가 주목한 지표는 계약 만기가 도래하는 아파트 전세 계약 건수입니다. 역전세가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계약 만기가 다가온다는 것은 더 많은 집주인과 세입자가 역전세난에 직면할 것이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안상우 기자asw@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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