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짧은 아시아 이민자 싱글맘’과 그 아들의 이야기 [비장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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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난 곳은 그녀의 많은 일터 중 하나인 대학교 앞 주점이었다.
이제 막 제대하고 복학한 그는 강원도 가난한 쌀농가의 장남이었다.
미혼모의 아이는 당시 법에 따라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또다시 짐을 쌌다.
'1990년 캐나다'를 배경으로 그녀와 아이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한국의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낮게 깔리는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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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스보이 슬립스〉
감독:앤서니 심
출연:최승윤, 이든 황
“1960년 추운 겨울밤, 담요에 꽁꽁 싸인 소영은 어느 절 계단에서 발견되었다. 추위에 홀로 버려진 이 아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여러 고아원을 전전했지만 건강하게 자랐고 성인이 되는 해에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났다.
그를 만난 곳은 그녀의 많은 일터 중 하나인 대학교 앞 주점이었다. 이제 막 제대하고 복학한 그는 강원도 가난한 쌀농가의 장남이었다. 둘은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가진 건 없지만 행복한 그들에겐 안정과 웃음이 넘쳤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영과 갓 태어난 그들의 아이를 남겨둔 채 남자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혼모의 아이는 당시 법에 따라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또다시 짐을 쌌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아이를 품에 안고 한국을 떠났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들려오는 내레이션. ‘1990년 캐나다’를 배경으로 그녀와 아이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한국의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낮게 깔리는 프롤로그. 우리는 아직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모른다. 곧이어 영화 제목이 뜨고, 학교 가기 싫어 도망치는 아이를 붙잡아 기어이 교실에 밀어 넣은 뒤 출근하는 엄마 소영(최승윤)을 만난다.
영어가 짧은 아시아 이민자 싱글맘의 삶은 고단하다. ‘영어가 짧은 아시아 이민자 싱글맘’의 아들에게도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준 엄마 때문에 ‘라이스보이(riceboy)’라는 별명이 생겼고, ‘동현’이라는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선생님 때문에 ‘데이빗’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1999년. 데이빗이라 불리는 동현이는 ‘가계도’를 그리는 숙제를 해야 한다. 엄마가 말해주지 않는 아빠에 대해서, 엄마 아빠가 나고 자란 땅 한국에 대해서, 아들은 계속 묻고 엄마는 계속 묻어둔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묻지 못하고 더 이상 묻어둘 수도 없는, 어떤 선택의 순간이 두 사람에게 찾아온다.
여덟 살에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간 앤서니 심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도착한 곳은 수많은 타인들의 마음이었다. 토론토 영화제가 뽑은 ‘2022 최고의 캐나다 영화’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 포워드 부문 ‘관객상’도 받았다. 데이빗의 나라에 사는 외국 관객과 동현의 고향에 사는 한국 관객이 같은 영화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큰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했고, 긴 여운이 남는다며 울먹였다. 노을에 물드는 하늘처럼 이 영화에 물들어버린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마음이 되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들려오는 내레이션. 마치 동화책의 처음과도 같은 소영과 동현의 탄생 이야기. 이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말할 때가 되었다. “소영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라고 감독이 얘기한다. “외롭게 남겨진 아내와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곁에서 지켜보는 느낌”으로 카메라를 움직여 영화를 찍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동화책은 대개 그렇게 끝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이런 느낌이 되었다. ‘두 사람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응원하겠습니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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