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 민족은 온몸이 아프다 [밥 먹다가 울컥]
식당 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하는 말은 그 바닥의 생리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말이 많다. 중국집 하는 선배는 “배달만 속을 안 썩이면 할 만하다”라고 한다. 온갖 배달대행 플랫폼이 돈을 벌었네, 몇 조원에 회사를 팔았네 하는 말이 쏟아지는 시끄러운 이 시대에도 중국집은 외주 배달업체를 안 쓰는 곳이 많다. 배달로 특화된 게 중국집이라 물량이 많아서 직접 고용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중국집 배달이 젤로 드러워서 그래. 빨리 갖다 달라고 난리 치는 건 중국집이여. 짜장 만드나 국밥 만드나 시간은 똑같은데 왜 중국집만 그리들 쪼아대남? 그래도 그릇 수거 안 허는 게 그나마 이 정도야. 사람 구할 데도 읎어서 내가 배달통을 들고 말지.”
요즘은 스티로폼이나 얇은 배달 전용 그릇이 많아서 중국집은 배달만 할 뿐, 수거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도 사람 구하기는 어렵다.
“오토바이도 사주고, 보험 들어주고, 인센티브 준다고 해도 사람이 읎어.” ‘주 5일 일하고, 초과근무수당도 주고 그래요?’ 하고 물었더니 버럭 화를 낸다.
“그거 안 하면 바로 고발당혀. 노동위원회인가 뭔가 출두하라고 난리 나. 다 허지.”
선배는 1970년대에 짐 자전거로 배달을 시작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고향 형을 따라 하게 된 일이었다. 우선 먹고 잘 곳이 필요했으니 중국집이 맞춤이었다. 대개 연회용 2층 방이나 내실이 있어서 영업 중에는 방으로 쓰고, 마감 후에는 직원용 숙소가 됐다. 가구라고는 ‘비키니 옷장(간이 행거)’이 전부였다. 휴일이 따로 없었는데 기름 파동인지 뭔지 나서 2주에 한 번을 강제로 쉬게 되어 남산 구경도 하고 그랬다.
“그때는 시골에서 애들이 올라오면 가게서 먹고 자면서 배달도 하고 양파도 까고 그랬지. 나도 그렇게 시작했지, 요새는 수습이라고 하던데 그때는 그냥 사장이 월급 주고 싶은 맘이 들면 그때가 요즘 말로 수습이 끝나는 거야. 아니면 용돈이나 받고 다녔지. 아니, 다닌 것도 아니고 2층에서 살았지. 식당이 집이야. 나가면 갈 데도 없었는디.”
배달원이 제일 힘든 일은 수금이었다. 나중에 준다고 해서 몇 번을 찾아가도 못 만난 적도 많다. 점심에 배달해주고, 오후에 ‘식대’ 받으러 갔다가 해가 질 때까지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식대 줄 사람이 올 때까지. 밥값 안 주면 오지 말라고 사장이 못을 박아서 하염없이 집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처먹은 밥값 주는데 곱게 주면 될 걸 왜 나한테 욕을 하고 그랬는지 몰라. 그 새끼덜은. 어떤 놈은 날 깔보구 내일 오라고 그러더라구, 내가 그랬지. ‘똥은 내일 나와두 오늘 먹은 식대는 오늘 주셔야 한다’구.”
어떤 공장은 한 달을 음식 시켜 먹었는데 수금해준다는 날에 갔더니 트럭에 짐을 싸고 있더란다. 야반도주 비슷한 거였다.
“사장한테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식대 안 주면 쫓겨난다고 트럭 앞에 웃통 벗고 드러누웠어. 앞바퀴에 다리 한 짝을 넣었지. 사장이 기함을 하더니 실린 짐에서 신일 선풍기를 한 대 꺼내주더라고. 돈 되는 건 이거밖에 없다고. 더 버텼더니 잠바를 뒤져서 가계수표 한 장도 주고. 그 담날 바꾸러 갔더니 부도수표더라고. 흐흐.”
한번은 무슨 작업장에 갔다가 식대 대신 전동공구를 들고 왔는데 경찰이 중국집에 찾아왔다고 한다.
“개자슥이 신고한 거여. 강제로 뺏어갔다고 강도라네? 서에 가서 ‘저늠들 배때기에 훔쳐간 짜장면 가락 있으니까 저늠들도 강도’라구 악을 썼지. 별일 다 있었어. 젤로 분한 건 오토바이도 못 올라가는 산꼭대기까지 요리 몇 접시 배달 갔는디 장난전화였어. 음식은 굳으면 다시 못 팔어. 화가 나서 오다가 고아원에 줘버렸지. 그때 애들 잘 먹는 거 보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보호) 시설에 밀가루 한 포대 지고 프로판가스 들고 짜장면 해주고 오고 그래.” 선배는 요리를 하고 싶었는데 수금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서 홀에 남았다. 배달도 뛰고 홀 서빙도 하고 장도 보고 팔방미인이었다. 옛날엔 장 보는 게 중요해서 주방장과 사장이 시장에 다녔다고 한다. 요새는 주문만 하면 들어오지만.
“사장이 나더러 대신 가래. 주방장이 좋아하더라고. 잔소리 하는 사장이 뭐 좋겠어. 나중엔 주방장이 혀를 내둘렀지. 내가 더 지독했어. 내 집처럼 물건 깎고 장을 보니까 주방장이 긴장하더라구. 재료비가 덜 나오니까 사장이 엄청 좋아했어. 내가 그 집에서 첨으로 퇴직금 받은 사람이야. 퇴직금 제도가 없었냐고? 있었겠지. 허나 주는 주인이 많이 없었어. 어느 식당이나 비슷했어. 그땐 그랬어.”
그는 사채를 얻어다가 자기 중국집을 차렸다. 그러다 배달원이 쉬는 날 대신 배달 나갔다가 골목에서 아이를 치고 그 수습을 하면서 중국집을 그만뒀다. 지금으로 치면 트라우마 같은 것이었다.
배달의 무게가 몸을 주저앉혔다
동대문에 내가 잘 가는 백반집이 하나 있었다. 서울의 시장이 다 몰려 있는 곳. 손님들에게는 잘 안 보이지만 시장 구석구석, 어느 틈에는 밥집이 있다. 분식집과 커피집, 잡화점도 숨어 있다. 시장 상품 파는 번듯한 곳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어느 구석에 있다. 그런 집들이 수많은 시장 상인을 먹인다. 요새야 플랫폼이 있어서 이곳저곳 배달 음식을 다채롭게 시킨다. 스파게티며 스테이크, ‘텐동’도 시키면 온다고. 그래도 시장 상인들 먹여 살린 건 밥집이다. 오랜만에 한 백반집에 갔더니 거기 여사장님이 안 보인다. 남편이 인상을 쓴다.
“입원했어. 산재(보험)도 안 들었는데.” 그 여사장님은 아주 억척이었다. 홀도 보고, 주방에서 밥도 만들고, 주로 배달을 뛰었다. 세계에서 제일 가벼운 배달 용구, 대한민국 여성들이 즐겨 쓰는 똬리 한 개가 그이의 벗이었다. 헝겊으로 만들어서 머리에 사뿐 이고는 밥상을 몇 층이고 쌓았다. 까딱없다고, ‘우리 친정엄마는 보리쌀 두 말도 이고 이십 리 장을 오십 년 봤다’고 별일 아닌 듯 말하던 여사장님이 생각난다. 똬리를 하나 만들면 3개월 만에 너덜너덜해져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시장 안에 친한 봉제 작업실이 많아서 두어 개씩 만들어온다고 했다.
“척추측만증인가 뭔가에다가 목디스크에 허리도 디스크, 무릎엔 관절염. 아주 박살이 났어. 의사가 기막혀 하더라고.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하셨냐고 말이지.”
몇천 원짜리 밥 팔아서 모은 돈으로 아파트 들어간다고 좋아하던 이 부부는 이제 한계를 넘었던 노동의 후과를 겪는다. 역습을 받는 중이다.
“이 가게 월세 15만원에 얻어서 집도 없을 때라 야매 다락방에서 2년을 살았어. 애도 여기서 학교 다녔지. 아침에 주방에서 세수하고 학교 갔다니까.”
‘야매 다락방’이란 적산가옥이나 단층 가게 내부에 불법으로 2층 구조물을 넣던 관행을 말한다. 1970,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다락방에서 손님을 많이 받았다.
사장님이 넋두리처럼 뭔가 중얼거리는데 새겨들으니 기가 막힌다.
“내가 돌솥비빔밥을 하자고 해서 그래. 그게 죄야.” 1990년대부터 돌솥비빔밥이 유행을 했다고 한다. 이집 저집 다 하는데 안 할 수 없어서 메뉴에 넣었다. 시장 점포에서 밥을 시키면 점포당 2~3인분이 보통이다. 서너 상을 한 번에 배달해야 효율적이다. 문제는 돌솥이다. 몇 상 모이면 돌솥 5~6인분이 한 번에 나갈 때가 잦았다. 돌솥 자체 무게만 1㎏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렇게 누적된 무게가 여사장님의 목과 척추를 주저앉혔다. 왜 아니겠는가.
이제 그런 여사님들, 배달 아주머니들 보기도 힘들다. 거의 은퇴했고, 충원도 안 된다. 3층짜리 상을 이고, 시장 골목에서 서커스하듯 인파 사이를 누비던 여사님들의 경추와 척추는 부상을 입고 은퇴하셨다. 한 세상의 풍경화가 사라졌다. 그런 건 안 보아도 괜찮은 그림이다.
“여사장님 나오시면 다녀갔다고 해주세요. 그나저나 이제 배달은 누가 해요.” “잘 가셔. 배달은 못해. 가게도 그만해야지. 시장도 불경기고 배달 밥도 잘 안 시켜. 뭣들 자시는가….”
나오는데, 벽에 돌솥비빔밥 8000원은 그대로 붙어 있는 게 보였다. 8000원.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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