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별천지] ③ 2천년의 전설 간직한 태기산…화전민의 애환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한 서린 역사만큼이나 눈부신 눈꽃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27개의 이야기를 연합뉴스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횡성=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대하소설 '지리산'으로 유명한 소설가 나림 이병주(1921∼1992) 선생이 소설 '산하'(山河)의 서문에 남긴 명언이다.
삼한 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 태기왕이 신라 박혁거세에게 쫓겨 산성을 쌓고 항전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전설이 깃든 태기산(泰岐山·1천261m).
2천여년의 세월을 간직한 태기산이야말로 역사와 신화라는 간발의 차이를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
태기왕의 한 맺힌 전설은 1960∼70년대 화전민들이 역경을 딛고 일궈낸 애환의 터전 위에 지금은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장관을 이룬 눈꽃 산행 명소로 꽃을 피웠다.
태기산은 횡성군 둔내면, 평창군 봉평면, 홍천군 서석면 등 3개 군에 걸쳐 있다.
탐방객들은 주로 횡성군 둔내면 삽교3리에서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를 잇는 '양구두미(兩鳩頭尾)재'를 거쳐 태기산 정상으로 오른다.
황금 비둘기와 거북 동산…두 개의 설화 간직한 양구두미재
차를 몰아 영동고속도로 둔내나들목에서 빠져나와 동·서를 횡으로 연결한 6번 국도를 따라 평창 방면으로 20㎞가량을 달리면 태기산터널이 나온다.
2018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1년 앞둔 2017년 준공된 길이 2.8㎞의 터널이다.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횡성 둔내와 평창 봉평을 잇는 길은 '양구두미재'가 유일했다.
해발고도 980m의 고갯마루인 양구두미재와 그 아랫마을인 둔내면 삽교3리 '구두미' 마을은 얼핏 같은 듯하지만 서로 다른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양구두미재에 얽힌 전설은 한자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비둘기가 주인공이다.
옛날 어느 가난한 선비가 묘를 잘 쓰면 부자가 된다는 말을 듣고 용한 지관을 통해 아버지의 묘를 쓴 곳이 바로, 이 고갯마루다.
한참이 지나도 재산이 늘지 않자 선비는 묘를 이장하기 위해 관을 들어냈다.
이 때 땅속에서 두 마리의 황금 비둘기가 나와 고개 너머로 날아 가버렸다. 그 후로 이 고개를 '양구데미'라고 불렀다는 전설이다.
설화를 머릿속에 그리고 풍력발전기가 올려다보이는 마을로 향했다.
삽교 3리다. 마을 초입새에는 구두미(龜頭尾) 마을이라는 표지석으로 미뤄 설화의 주인공은 거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옛날 옛적 태기산 자락에 약초를 캐는 심마니 청년이 산 아랫마을 처녀와 사랑을 나눴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가난한 심마니에게 보낼 수 없었던 처녀의 아버지는 심마니가 잠든 움막에 불을 질렀다. 처녀는 사랑하는 심마니 청년을 구하기 위해 불타는 움막으로 뛰어들었다.
결국 두 청춘은 이승에서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땅을 치며 후회한 처녀의 아버지가 딸과 심마니를 합장한 곳에 커다란 거북 모양의 동산이 생겨났다.
이듬해 봄 화전민 농부가 거북 동산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갈아엎어 농사를 지었다. 이때부터 마을에는 흉흉하고 괴이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마침 마을을 지나던 한 선사는 거북 동산의 머리와 꼬리를 복원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말에 촌장은 주민들과 함께 거북 동산을 원래대로 복원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마을에 평온을 되찾고 농사도 풍년이 이어지나 이때부터 거북의 머리와 꼬리를 의미하는 구두미 마을이 됐다.
삽교 3리 주민들은 거북 동산 옆에 거북이 한 쌍이 업혀있는 형상의 마을 회관을 지어 랜드마크로 활용하고 있다.
화전민의 애환 서린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양구두미재와 구두미 마을의 설화를 뒤로하고 평창 봉평면과 경계인 '무이 쉼터'에서 한숨을 돌린 뒤 '태기산 국가생태탐방로'로 발길을 옮긴다.
태기산의 겨울 풍경은 시리도록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새하얀 상고대라도 피어나면 눈부신 눈꽃 풍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파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풍력발전기에 부딪히는 웅장한 바람 소리에 정신없이 걷다 보면 학교터가 나온다.
봉덕국민학교 태기분교다. 해발 1천200m 고원지대에 세워진 하늘 아래 첫 학교다.
1968년 6월 개교해 1975년 폐교된 태기분교는 화전민의 애환이 서려 있다.
박순업 전 횡성문화원장의 '태기분교의 설립 배경과 시대상 고찰' 등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부는 1968년 '화전정리법'을 공포해 도내에 흩어져 있던 화전민을 태기산 고원지대로 이주시켰다.
화전민들은 산을 깎고 초목을 태워 계단식 밭을 만들고 움막에서 생활했다.
벌목과 개간 일을 하는 화전민에게 정부는 밀가루만 제공했다.
보릿고개 시절 밀가루를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태기산 화전민촌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때 120여 가구가 이주했다. 이 중에는 둔내면 주민뿐만 아니라 봉평면 무이리 주민들도 양구두미재를 넘어와 살기도 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 못 배운 한을 대물림하게 하지 않으려는 화전민 사이에는 자녀 교육에 대한 갈망이 컸다.
하지만 학교에 가려면 산길을 30㎞ 이상 내려가야 해 가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국가에서도 어쩌지를 못한 학교 건립은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명순(81) 교사의 노력으로 열매를 맺었다.
76명의 학생을 전교생으로 첫 입학식을 한 태기분교는 한 때 150여명이 다녔지만, 정부의 화전지 개발사업 실패로 화전민을 다시 강제로 내몰면서 개교 8년 만인 1976년 문을 닫았다.
화전민이 사라진 태기산은 2008년 풍력 발전단지가 들어선 데 이어 국가생태탐방으로 조성되면서 눈꽃 설경과 백패킹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비극의 태기왕이 남긴 흔적…영서와 영동의 분기점 넘나든 장돌뱅이
태기산의 원래 명칭은 덕고산(德高山)이었다.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이 산에 근거지를 두고 신라 박혁거세와 항전했다고 해서 태기산이라고 명명됐다.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태기산 자락인 성골 골짜기에는 허물어진 태기 산성터를 비롯해 집터와 샘터 등의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횡성·평창지역에는 태기왕과 관련한 설화와 지명이 유독 많다.
신라군에 쫓긴 태기왕의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강물에 빨아 널고 잠시 쉬었다는 갑천(甲川), 피난 온 태기왕이 화동 골짜기에서 볍씨가 나와 농사를 지었다는 둔내면 화동(禾洞)리, 태기왕이 군사들을 훈련한 활터에서 유래한 궁종(弓宗)리.
태기왕의 생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평창군 봉평면 멸온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멸(滅)은 죽음을 뜻하고 온은 백(百) 또는 온통이라는 뜻으로 '수많은 군사가 죽어 멸망했다'는 멸온에서 유래한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시 '면온리'로 개칭됐다.
태기왕이 죽자 진한 군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을을 새로 개척해 정착한 곳이 청일면 신대(新垈)리다.
태기산 입구에는 망을 보던 군사가 신라군의 기습으로 패망하자 굳어서 촛대 모양의 바위가 되었다는 '촛대바위' 등도 남아 있다.
달빛에 물든 신화 속 태기왕은 쫓기다 최후를 맞이한 비극의 왕이지만 지역 주민들의 기억에는 애틋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로 각인된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일부 지리서에는 양구두미재를 태기치(泰岐峙)라고도 표기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큰 분기점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당시 영동의 가장 큰 도시인 강릉(옛 명주)이 지금의 봉평까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양구두미재가 영서와 영동의 경계였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횡성군 둔내면지(屯內面誌)에도 구두미 마을은 동서를 연결하는 큰 통로로 소 장수, 행상, 보부상들의 경제적 상권의 주요한 요충지였다고 기록한다.
현재 양구두미재로 이어지는 둔내면과 봉평면은 고랭지 농업이 발달한 것은 물론 국내 동계레포츠 산업을 견인하는 굴지의 리조트들이 즐비하다.
문득 소 장수들이 강릉 우시장에서 몇십 두씩 매입해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평창 대화장을 거쳐 양구두미재를 넘어 도착한 구두미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다는 구전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친다.
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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