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재 '중고 신인' 강유전체...신경모방 컴퓨팅 미래 밝힌다
데뷔 당시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역주행을 하는 사람에게 ‘중고 신인’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래됐지만 신선하다는 의미죠. 이번 달에 다루는 강유전체도 신소재 분야의 중고 신인입니다.
처음 발견된 지는 100년이 넘었고, 강유전체를 이용해 전원을 꺼도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 반도체를 시도한 것도 1950년대부터입니다. 하지만 오래된 산업 소재인 산화하프늄이 강유전체였다는 사실이 2011년에 밝혀진 후에야 강유전체 연구는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이 분야는 2006~2020년 전 세계 논문을 수집한 네덜란드 라이덴대 데이터에서도 높은 복합 연평균 성장률(CAGR)을 나타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재료는 전기적 특성에 따라 도체, 반도체, 부도체 등으로 분류됩니다. 이 중 부도체 재료는 전기장이 걸려있을 때 재료 내부의 이온, 전자 등의 평균적인 위치가 바뀌며 분극이 유도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결정구조를 갖는 일부 재료의 경우엔 이렇게 분극을 유도한 전기장을 제거한 후에도 그 분극이 유지되는 특성인 강유전성을 보입니다. 이런 특성을 갖는 재료를 강유전체라고 합니다.
● 전압을 제거해도 정보를 잊지 않는 강유전체
강유전성은 1920년 주석산 칼륨나트륨(KNaC4H4O6)이라는 재료에서 최초로 발견됐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타이타늄산바륨(BaTiO3)이란 강유전체가 발견되며 관련 분야의 연구가 폭발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강유전체 연구는 현재까지 꾸준히 증가하고 있죠.
오늘날 강유전체 소재는 플래시 메모리처럼 전원을 제거해도 정보가 유지되는 비휘발성 메모리의 차세대 소재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과거엔 강유전체 소재를 nm(나노미터・1nm는 10억 분의 1m) 규모로 작게 만들었을 때 강유전성 및 부도체 특성이 나빠지는 한계가 있었지만, 2011년에 이미 상용화된 반도체 재료인 산화하프늄(HfO2)에서 강유전성이 발견돼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산화하프늄에 전기장을 걸면 내부의 산소 이온이 이동하면서 분극이 발생합니다. 이런 강유전성을 활용하면 강유전성 전계효과 트랜지스터(FeFET・Ferroelectric field-effect-transistor)라는 소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트랜지스터는 컴퓨팅 시스템에서 스위치 역할을 하는 소자로, 소자에 가하는 전압에 따라 전류가 제어됩니다.
일반 트랜지스터의 경우, 전압을 가할 때 흘렀던 전류와 그에 따른 저항은 전압을 제거하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강유전체인 FeFET는 전압을 제거해도 분극이 남아있습니다. 전압을 가했을 때의 저항 상태가 전압을 제거해도 유지되는 거죠.
● 강유전체 메모리가 DRAM 대체하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DRAM이나 플래시 메모리를 대체하기 위해 재료공학자들은 그동안 다양한 새로운 메모리 소자를 연구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강유전체 메모리는 재료의 결함에 의존하지 않고, 에너지 효율이 높으며, 동작 속도가 빨라 특히 경쟁력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최근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1ns(나노초・1ns는 10억 분의 1초) 이하의 빠른 동작 속도를 자랑하고, 소자의 크기는 22nm 이하까지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강유전체 메모리가 기존에 소비되던 공간과 전력 모두를 줄이는 반도체의 미세화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강유전체 메모리가 DRAM을 대체하려면 반복되는 외부 전압에 대한 내구성이 더 좋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재료 및 공정 분야에서 추가 연구가 필요합니다. 또한 강유전체 메모리는 단순한 구조 덕분에 플래시 메모리 같은 3차원 구조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한 개의 셀로 여러 다른 상태를 함께 저장하는 등 멀티 비트를 안정적으로 실행하는 기술도 앞으로 더 개발해야 합니다.
이런 기술적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과 인텔, TSMC, 글로벌파운드리스 등의 글로벌 반도체 업체에서는 강유전체 메모리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 및 연구소에서도 연구 개발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 트랜지스터 겸 메모리가 되는 유망 미래 소자
현대 컴퓨팅 시스템의 성능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 중이지만, 사용되는 시스템은 여전히 처리장치와 기억장치가 분리된 형태입니다. 헝가리의 전설적인 과학자 존 폰 노이만이 제안한 방식이죠. 이 때문에 처리장치와 기억장치가 정보를 교환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되기 때문에 성능 및 에너지 효율이 낮아집니다.
이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공학자들은 메모리 안에서 정보처리를 하는 프로세싱 인 메모리(PIM), 생물체의 신경계를 모방하는 신경모방 컴퓨팅(Neuromorphic computing) 등의 기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적은 에너지로 더 빠른 연산을 할 수 있는 FeFET는 이러한 응용 기술 분야의 유망한 미래 소자입니다.
FeFET는 반도체의 가장 기본적인 소자인 트랜지스터 소자와 구조가 동일한데, 트랜지스터 고유의 스위치 기능에 더해 강유전체로 인한 메모리 기능까지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트랜지스터 겸 메모리로서 PIM 기술에 사용하기 적합하죠.
또한 잘 제어된 전기 신호를 활용하면 여러 분극 상태를 구현할 수도 있어서 신경계에서 뉴런과 뉴런 간의 상관관계 강도를 결정하는 시냅스 역할도 FeFET는 할 수 있습니다. 뉴런과 같이 반복되는 전기 스파이크를 모았다가 방출하는 동작도 가능해서, 최근엔 신경모방 컴퓨팅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은 소자로도 꼽힙니다.
저는 대학원에 입학한 2008년부터 강유전체 소재 및 소자에 대한 연구를 약 15년 동안 진행해왔습니다. 적합한 소재가 없어서 곤란했던 연구 초창기와 산화하프늄 기반 강유전체 연구가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던 시기를 모두 거쳤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대한민국의 최대 산업이며, 후발주자로 시작해서 현재 세계를 선도하기까지 어떤 산업 분야보다도 역동적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의 큰 혁신은 항상 신소재의 개발에서 시작됐고, 신소재의 개발은 당장은 불가능해보여도 포기하지 않았던 연구자들의 노력과 정부 및 산학연의 협력이 더해져서 가능했습니다.
강유전체 기반 메모리도 아직은 상용화할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현재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을 미래의 재료공학자들의 손으로 또 다른 혁신이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 필자소개
박민혁 서울대 재료공학부 조교수. 2014년 서울대에서 재료공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15~2018년 독일 드레스덴공대 나노전자재료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했다. 2018~2021년 부산대 재료공학부 조교수를 거쳐 2021년부터 서울대에 재직 중이다. 강유전체 산화물을 이용한 반도체 소자 응용 및 에너지 소자 응용에 대해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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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혁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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