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는 새로운 여성 정치 주체들의 이름
[이수영 미술작가]
내가 누구인지는 그들이 정했다. 그들이 나를 마녀라고 부르면 나는 마녀가 된다. 마녀로 찍히면 죽임을 당했다. 마녀라서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하기 위해 마녀가 된다. 마녀는 절멸되어야 할 객체라는 뜻이다. 호명한 주체가 가해자가 되고 호명된 객체는 피해자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마녀사냥의 구조이다. 한국 정서에서는 '마녀'라는 말 대신 '빨갱이'라는 말을 넣으면, 안타깝지만, 더 잘 공감된다.
2017년 2월 4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트럼프 정권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한 시위자가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는 사진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세계 여성의 날 시위를 비롯한 많은 시위 현장에서 이 슬로건이 등장했다. 이 슬로건에서 마녀 호명의 순서는 바뀌어있다.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을 ‘마녀’라고 부르는 주체로 서고 마녀사냥을 한 가해자를 특정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나의 목소리가 '나'를 새로운 주체로 세운다. 마녀사냥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연다.
원래 제목인 <마녀, 마녀사냥 그리고 여성>을 갈무리 출판사가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로 바꾸어 낸 이유는 바로 이 새로운 주체의 정치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16, 17세기 유럽 전역에서 구조적이고 총체적으로 자행된 마녀사냥의 희생자들 역시 수동적 피해자가 아닌 차별과 배제에 저항하던 소수자-여성들이었다. 21세기 지구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여성 살해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스스로를 '마녀의 후손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누군가를 마녀라고 호명하는 과정은 매우 구체적이며 구조적이고 총체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기소자의 다리를 비틀고 매달고 불에 태우는 물리적인 신체 파괴만이 아니다. 마녀사냥에는 심의관, 판사, 변호사와 같은 법 전문가와 재판 조직이 구축되어야 한다. 시 위정자는 마녀 재산 몰수제도를 도입했다. "가이스가 린트하임 영주에게 다리와 교회 재건에 돈이 필요하니 자신이 (마녀)박해를 시작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하는 보고서"에서 보이듯이 종교지도자, 봉건 지배층, 도시 유력자, 집행관 등 마녀 화형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날파리 군단도 있었다. 또 새로운 고문 기구들을 고안하고 만드는 전문가도 조직되었다. 저 여자가 마술을 부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마을사람들의 공포어린 증언 역시 필요했으며, 저 여자들은 생산력도 없고 가치 없는 생명이라고 여기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힘도 필요하다. 이 폭력의 과정에서 비-마녀로 생존을 허락받고자 스스로를 훈육한 새로운 신체들의 탄생도 필요하다. 마녀사냥(여성살해femicide)은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삶의 본질적인 토대들을 파괴"하는 폭력이다.
이 폭력의 구조는 수백 년 전 마녀가 빗자루 타고 날던 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아공 북부, 베냉 공화국, 카메룬, 탄자니아,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등 아프리카에서 1991~2001년 사이에 적어도 2만3000명의 ‘마녀’가 살해되었다. 3000명의 여성이 북부 가나의 '마녀 수용소'로 추방되었다.(122쪽). 케냐에서는 수천 명의 여성이 산 채로 태워지거나 땅에 묻혔고, 또는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고 추정된다(142쪽).
구조조정과 자유무역화로 아프리카 공동체들은 파괴되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할 수 없게 되었고, 교육 보건 대중교통 등의 기본적인 공공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직업을 구할 수 없는 많은 젊은 남성들은 여성들, 특히 혼자인 여성, 나이 든 여성을 약탈하고 파괴한다.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한다'는 환등상에 가해자는 빙의된다. 총체적인 삶은 불안정해지고, 왜 누구는 부자가 되고 누구는 가난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고 원망과 의심은 약자에게 쏟아진다.
페데리치에 의하면 마녀사냥(여성살해)의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새로운 자본의 전유 프런티어가 일어나는 곳에 마녀사냥이 일어난다. 책에 나오는 생생한 예를 하나 옮겨보면, 콩고민주공화국 다이아몬드, 구리 광산 지역에서 무장단체가 마을의 여성들을 학살한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고 땅은 개발된다. 광업 기업이 땅과 강을 오염시켜도 기업은 면책된다. 이 뒤에는 세계은행과 유엔 같은 국제기구가 요청한 경제 정책과 광업법 제정과 이에 협조하는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예에서처럼 자본의 전유가 대상화하는 프런티어는 세계생태체제이다. 즉 산과 강, 광물, 마을, 인간의 사유, 정서를 포함한 생명 그물이 전유의 대상이다.
이렇듯 마녀사냥(여성살해)은 구조적이며 총체적인 폭력이다. 우주 전체와 맞짱 뜨는 느낌이다. 모든 폭력의 배후는 신자유주의라는, 하나마나한 무력한 말처럼 들린다. 어찌할 것인가.
페데리치는 아주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마녀사냥이 양산되는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고 이 박해를 기록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 인권 운동가들, 사회단체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공동체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그 모델로 <비아 깜뻬씨나>,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 사빠띠스따를 든다. 모두 성공의 기초 조건인 여성권력의 구축과 연대를 경험한 조직들이다(157). 직접행동 전술의 예도 있다. 남편들에게 지참금 살인을 당해 불타 죽는 여성이 늘자 1990년대 인도 여성들은 살인자의 집 앞이나 경찰서에서 거리 연극과 시위, 연좌 농성을 했다, 살인자들을 모욕하고 창피를 주는 노래와 슬로건을 만들고 남자들이 다시는 지참금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는 공개모임을 마련했다. 아프리카 풀뿌리 여성운동은 마녀사냥꾼을 욕보이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일부러 꾸며낸 저속하고 불온한 행동을 하면서 모욕을 주었다(159). 이들은 집합적 정념으로 새로운 정치적 기술을 발명해 냈다.
페데리치는 강력한 법적 처벌을 요구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폭력의 책임이 있는 권력에 기대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발리바르의 '시민다움의 정치'를 떠올리게 한다. 자본주의는 전유의 프런티어를 객체화하여 비가시화하고 주체로 설 수 없게 한다. 자연도 소수자도 객체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주체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가해자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 ‘마녀’라는 새로운 주체를 세우듯이 말이다. 이제 '마녀'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와 그 정치 주체들의 이름이다.
[이수영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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