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부산에서 발견하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들
4월 28일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 탄신 478주년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통영 여수 뿐만 아니라 부산과도 인연이 있는데요. 국제신문 뉴스레터 뭐라노가 부산에서 이순신을 기억할 수 있는 다섯 곳을 소개합니다.
‘이순신 장군’하면 임진왜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며 일어난 전쟁입니다. 조선군은 왜군에 맞서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과 함께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 명량대첩을 이끈 분입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의미 있는 전투가 또 있는데요. 바로 부산포 해전입니다.
임진왜란 중인 1592년 9월 1일 일어난 부산포해전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들이 연합해 대승을 거둔 전투입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조선 수군들이 가덕도를 거쳐 일본 수군이 점령해있던 부산포까지 이르는 동안 왜선 130여 척을 격침시켰습니다. 부산포해전에서 패전한 일본 수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설 수 없게 됐으며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의 판도를 크게 바꾼, 조선을 지켜낸 결정적인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부산포를 비롯해 부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릴 수 있는 곳들을 찾아볼까요.
▮천성진성
먼저 부산포해전에서 승전 교두보 역할을 한 가덕도의 ‘천성진성’입니다. 천성진성은 일본의 쓰시마섬에서 부산·진해쪽으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1544년 가덕진과 함께 축성된 성입니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장계 부산파왜병장(狀啓 釜山破倭兵狀)’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해전을 앞두고 천성진성에 잠시 머물러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산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에도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어 부산포해전의 시작이자 마침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몰운대(沒雲臺) 충신정운공순의비
두 번째는 바로 ‘다대포 몰운대공원’입니다. 말그대로 안개와 구름 끼는 날에는 이 일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 몰운대에는 이순신 장군의 오른팔 녹도만호 정운의 순국을 기리는 비석이 1798년부터 세워져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를 공격하기 직전 이미 500여 척의 적선이 부산포에 정박해있음을 확인 후, 당장 공격할 것이냐 일단 후퇴한 것이냐를 두고 회의를 합니다. 이른 새벽 가덕도에서부터 계속 이동하며 싸우느라 병사들이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녹도만호 정운은 “여기서 후퇴했다간 적의 기를 살려주는 꼴”이라며 후퇴를 적극 반대합니다. 이순신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본과의 전투에서 앞장서 분전하던 녹도만호 정운은 결국 머리에 적탄을 맞고 전사합니다.
정운공순의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정운 장군이 몰운대 아래에서 일본군을 만났을 때, 몰운대의 운(雲)자가 자신의 이름자인 운(雲)과 음이 같음을 알고서 그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웠다고 합니다. 정운의 순국을 기리는 장군의 제문을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 한 번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지만 유독 그대 죽음은 마음 아프구나…(중략) 적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나아갔으니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의 공이겠는가’라며 정운을 향한 충무공의 애정과 그를 잃은 안타까움이 드러납니다. 다대포해변 몰운대공원 끝자락 정운공순의비에 가면 부산포 해전 당시 500여척의 왜선과 힘껏 싸운 이순신 장군과 그가 아낀 정운 장군의 애국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용두산공원 석당박물관 국립해양박물관
이외에도 부산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봤을 용두산 공원에는 이순신 동상이 있죠. 서구 부민동에 위치한 동아대 석당박물관에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이순신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영도구 동삼동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에서는 판옥선이나 거북선 모형 뿐민아니라 1592년 4월 19일부터 1594년 4월 20일까지의 장계 68편이 수록된 충민공계초 등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릴 만한 다양한 소장 자료가 있습니다. 현재는 해양박물관 리뉴얼 공사로 인해 7월 초에 재개관한다고 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산포해전은 적의 본진을 초토화해 임진왜란의 판도를 크게 바꾼, 오늘날 이 나라와 부산이 건재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결정적인 전투였는데요. 장군 스스로도 가장 큰 성과를 올린 전투였다고 자평할 정도였습니다. 전투 후 승전 보고를 위해 조정에 장계를 올리면서 “전쟁이 발발한 후 4번 출전하여 적과 10여 차례 싸워 모두 승리했으나 장수와 병사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포해전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며 부산포해전을 이전까지의 성과 중 가장 큰 승리로 평가했습니다.
이렇게 부산포해전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음에도 부산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고 부산포해전의 역사를 기억할 만한 역사기념관 같은 공간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무분별한 학살과 침략의 과정 속에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호국선열’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국제신문 뉴스레터 뭐라노가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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