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히치콕도 빠져든 美 화가…국내 첫 전시 가보니[30초미술관]

김성휘 기자 2023. 4. 29.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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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월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전 열린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 원제 Nighthawks). 미국 시카고미술관 소장/사진= 시카고미술관 홈페이지


뉴욕의 쓸쓸한 거리, 캄캄한 밤 홀로 불을 밝힌 식당과 그 안의 남녀. 또는 어느 호텔방에 외롭게 앉아 있는 여성...

느낌이 오시나요. 네, '빛의 화가' '고독의 예술가'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작품입니다.

에드워드 호퍼 전시에 유지태 있다?

호퍼는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화가로 활동하며 도시는 물론이고 자연의 풍광을 독특한 화풍으로 남겼습니다. 미국에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있는 그의 작품을 국내에서 직접 볼 기회가 드물었는데요.

지난 20일부터 8월20일까지 넉 달간 덕수궁 옆 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본관)에서 호퍼의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첫날 직접 감상한 결과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 이유입니다.
에드워드 호퍼 전시중인 서울시립미술관 전경/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국내 첫 개인전…몰랐던 사실들
첫째 볼거리가 많은 대규모 전시입니다. 시립미술관은 호퍼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뉴욕 휘트니미술관과 공동기획해 회화, 드로잉, 판화(에칭), 각종 아카이브 자료 등 270여 점을 들여 왔습니다. 이 만한 양의 미술작품을 한 자리에서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각 층에는 그가 그림을 습작하고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다졌던 파리 체류 시기, 뉴욕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1910~1920년대 작품, 자화상을 포함해 말년의 대표작이 있습니다. 미술관 측은 2→3→1층 순서로 감상하길 추천했습니다.

둘째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호퍼가 유명해지기 전 삽화가로 활동했던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부인 조세핀 니비슨 호퍼의 존재감을 확인한 것도 수확입니다.

조세핀은 호퍼의 조력자이자 그 자신도 화가였죠. 유화 위주로 그리던 호퍼가 수채화 기법을 체득하고, 그림을 점차 판매할 수 있게 된 것도 조세핀의 기여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셋째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시청각 자료들입니다. 호퍼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 중 백미입니다. 필 그랩스키가 감독한 'HOPPER: AN AMERICAN LOVE STORY'입니다. 1층 전시장의 마지막 공간에서 1시간30분짜리 영화가 반복상영됩니다. 3층엔 그림 속 주인공의 위치에서 사진을 남길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그림 앞 사진·필기 제한…다큐영화는 '선물'
배우 유지태의 목소리 도슨트(오디오 가이드)도 있습니다. 유지태는 호퍼의 '자화상'을 비롯, 25점 해설을 녹음했네요. 이 목소리는 단말기 또는 휴대전화 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유료).

빌려온 작품들이다보니 보존과 관리가 까다로운 편입니다. 다소 어둡게 느껴지는 공간에는 소유 기관측 요청대로 조도를 맞췄다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사진촬영이 금지되고 일부 공간에서만 플래시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작품을 보며 필기구로 메모하는 일도 관계자들이 제지하고 있습니다. 혹 그림에 닿을 수 있어서 그렇다네요. 원 소장기관인 휘트니미술관에 가서 봤다면 사정이 달랐겠죠.

그런데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은 좀처럼 즐거워보이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호텔방' 그녀 충격적 비밀?...명작 빚어낸 '외로움'

#여기는 호텔 방입니다. 한 여성이 앉아있죠. 방금 여행을 온 것일지, 떠나는 짐을 싸는 것인지 방 한쪽에 가방이 열려있고 옷은 걸어뒀습니다. 침대에 걸터앉아 종이를 보고 있네요. 편지일까요.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 표정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림A]

[그림A] 에드워드 호퍼 '호텔 방(1931)'을 이용한 포스터 샘플/사진= 스페인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홈페이지


#또 다른 방, 아파트인지 호텔인지 모를 공간입니다. 바깥은 어두운데 방은 불이 환합니다. 길 건너편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니, 한 여성이 옷을 갈아입는 듯합니다. 창문을 등지고 뒷모습만 살짝 보이죠. 아까 호텔 방의 그 여성 아닐까요. [그림B]

'그림A'는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방'(1931)입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에 있습니다. '그림B'는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한 '밤의 창문'(1928)입니다.

[그림B] 에드워드 호퍼 '밤의 창문'(1928),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소장/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호퍼의 매력은 뉴욕으로 대표되는 현대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미스터리한 환상물 같다는 점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호퍼는 흔히 사실주의 화가로 불리지만 있는 그대로만 그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를 모티브로 하면서 자기 상상력으로 그림을 채웠죠.

그의 상상 또한 완전 허구는 아닙니다. 어린 시절 뉴욕 교외의 나이액(Nyack) 고향 집에서 뉴욕에 오갈 때의 잔상, 화가가 된 뒤 여름마다 시골 마을을 다녀가고, 아내와 자동차로 미국횡단 여행을 했을 때의 기억들이 화가의 마음속에서 고유한 이미지로 재탄생합니다.

유명 작품 '주유소'(Gas, 1940) 또한 미국 어디나 있을 법한 장면이지만 특정 장소가 아니라 호퍼가 기억에 상상력을 더해 빚어냈다고 하죠. 평론가들은 그게 호퍼 작품세계의 큰 특징이고, 그를 인기 작가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런 작품 중 등장인물의 고립감, 외로움을 짙게 투영하면서 관람객들을 빨아들이는 명작이 많습니다. 때문에 호퍼의 그림 속 배경과 인물은 시공간을 초월해 2023년의 우리를 그린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자화상'(1925-1930), 뉴욕 휘트니미술관 소장/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이와 관련 3년 전 분석도 흥미롭습니다.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던 2020년 3월27일, 영국 '가디언'은 "오늘날 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라는 분석을 실었습니다.

비대면 활동으로 인한 고립, 단절, 소외 같은 정서가 극대화했는데 놀랍게도 100년 전 활동했던 작가가 이를 대변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만큼 호퍼의 작품에는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 마음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셈이죠.

한편 A, B 두 그림은 같은 인물을 모델로 합니다. 호퍼의 부인 조세핀 니비슨 호퍼입니다. 애칭 '조'로 불린 조세핀은 화가에게 단순한 모델이 아니었습니다. 호퍼의 A부터 Z까지 조세핀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호퍼 부부는 그렇게 금슬이 좋았지만, 평소 티격태격하기도 했다죠.

백악관 집무실과 공유·공효진 '쓱 광고' 공통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는 모습/사진제공= 백악관 아카이브

버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 두 번째 임기이던 2014년, 백악관은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그림 두 점을 대여합니다. 대통령집무실인 오벌오피스에 걸기 위해서죠. 두 작품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어서 화제가 됐습니다.

그 중 '벌리 콥의 집, 사우스 트루로'가 있습니다. 호퍼는 1930년 메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의 시골마을 트루로(Truro)를 방문, 그곳 우체국장 벌리 콥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그곳에 작업실 겸 집을 구해 여름 별장처럼 썼습니다.

백악관은 대통령이 이 그림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에 잠긴 뒷모습을 공개했습니다. 마치 심각한 국정과제와 씨름하다 머리를 식히거나, 또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듯하죠.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사람은 오바마 뿐만 아닙니다. 호퍼는 자신이 살던 시기를 넘어 지금까지도 수많은 화가, 사진가, 영화감독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SSG 광고/사진= 유튜브 캡처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 속 살인자 노먼 베이츠가 사는 집은 놀랍게도 호퍼의 그림 '철로변의 주택'과 닮았습니다. 어딘지 쓸쓸해보이는, 사람이 사는지 안사는지 모를 이 집의 전경은 테렌스 맬릭 감독의 '천국의 계단'(1978)에도 등장하죠.

빔 벤더스 감독의 '돈 컴 노킹'(2005)은 영화 속 장면이 호퍼의 그림들, 특히 '나이트호크'(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와 유사합니다.

국내에서는 2016년 신세계의 쓱(SSG) 브랜드 광고를 탄생시킵니다. 광고 속 모델 공유와 공효진의 무표정한 얼굴을 볼까요. 색감,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마저 호퍼의 작품과 유사하죠. 호퍼의 작품을 알고나서 광고를 보면 '아~'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SSG 광고/사진= 유튜브 캡처

호퍼가 시공간을 넘어 영감을 주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빛과 그림자의 선명한 대비, 햇빛이나 인공조명이 깔끔한 선을 이루면서 캔버스를 나누는 것은 사진·영화 등 현대시각예술과 맞닿은 부분입니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인 느낌이 중첩되는 특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표현했던 사람들의 고독감, 소외감은 지금도 여전하고요. 호퍼는 또 한 명의 현대미술 거장인 마크 로스코에게도 영향을 준 걸로 알려졌으니 정말 '호퍼 스타일'은 곳곳에 퍼져 있네요.

서울시립미술관의 호퍼 전시(8월20일까지)는 백악관도 그림을 빌렸던 휘트니미술관과 협업했습니다. 휘트니미술관은 호퍼 사후에 부인인 조세핀이 작품과 스케치 등을 기증, 미국서 호퍼 컬렉션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입니다. 물론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라는 걸출한 미술수집가가 호퍼의 후원자였던 인연도 있고요.

에드워드 호퍼의 '자화상'(왼쪽, 1925-1930)과 '오전7시' 일부(오른쪽, 1948). 뉴욕 휘트니미술관 소장/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김성휘 기자 sunnyk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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