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가 앞서간 알파걸의 시대 [K-콘텐츠 뒤흔드는 걸크러쉬]

2023. 4. 2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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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리포트] ‘기울어진 운동장’ 움직인 ‘퀸 메이커’



“그 뻔하고 올드한 걸 김희애와 문소리는 왜 이제야 찍을 수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최근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에 대한 누리꾼의 한 줄 평이다. 이 한줄은 조회 수 20만 건, 리트윗 6600건을 기록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콘텐츠 산업에 촌철살인을 날렸다는 반응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2018년 배우 김희애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배우들이 선택할 작품이 많지 않다. 너무 할 게 없으니 머리 자르고 남자 역할을 맡을 생각도 했다”고 씁쓸함을 토로했다. 배우 손예진 씨 또한 “여성이 주체가 돼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시나리오가 정말 많지 않다”며 “사실 꽤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고 점점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것도 맞다”고 말했다. 불과 5~6년 전의 이야기다.

유명 남자 배우가 아니면, 보이그룹이 아니면 손익분기점을 넘기 어렵다던 대중문화계의 속설은 옛말이 되고 있다. 드라마에선 여성들의 복수와 야망을 그린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가요계에선 북미 최대 음악 축제로 꼽히는 ‘코첼라’에서 한국의 여성 아티스트가 간판 출연자로 참가한다. 오락 프로그램에선 축구를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높은 시청률을 얻고 있다. 2023년 봄의 일이다. 영화·드라마·공연·음악 등 대중문화 콘텐츠 전반에 여성 중심 콘텐츠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콘텐츠 산업에 부는 변화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남성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부수적인 역할이 많았다. 영화 ‘헤어질 결심’, ‘아가씨’, ‘친절한 금자씨’ 등을 쓴 정서경 작가는 2022년 9월 열린 ‘2022 벡델데이’ 행사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어딘가 비슷하다고 느낄 것”이라며 “제1 역할, 제2 역할, 제3 역할, 제4 역할까지 남자 배우다. 다섯째, 여섯째에서야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성 배우들이 제가 보기에 민망한 장면을 연기하러 나온다”고 말했다.

TV 프로그램도 다르지 않았다. 2015~2016년 당시 미디어는 ‘남초 예능 시대’, ‘아재들의 전성시대’, ‘예능은 남남노소’, ‘남자 버라이어티 전성시대’란 기사를 앞다퉈 쏟아냈다. 육아·요리·청소 등 전통적으로 여성이 강세를 보인 콘텐츠에도 여성 출연자들이 자취를 감추고 남성이 자리 잡았다는 게 기사의 골자였다. 당시 문화 평론가들은 사회가 기대하는 남성관과 남성성의 변화가 예능에서의 남초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가요계에서는 보이그룹이 곧 성공 조건이었다. 걸그룹을 뽑는 ‘프로듀스 101’보다 보이그룹을 뽑는 ‘프로듀스 101 시즌2’가 시청률과 상업성 측면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고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보이그룹 ‘워너원’ 역시 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트로트 판에서도 남성 버전이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업계의 생각은 간단했다. ‘돈’이 되니까. 남성 서사의, 남성 주연의 콘텐츠가 흥행에 안전하기 때문에 선택받는다는 것이었다. 김영민 영화 저널리스트는 2016년 9월 웹진 아이즈에 쓴 칼럼에서 “실상 위력적인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남자 배우에 대한 관객 선호도가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안전한 영화의 기준은 유명 남자 배우들이 떼로 등장하는 블록버스터라는 계산이 선다”고 분석했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콘텐츠 성공에 대한 의구심이 미디어업계 전반에 퍼져 있을 때였다.


‘퀸메이커’의 등장

블랙핑크는 4월 15일과 22일(현지시간) 미국 켈리포니아주 인디오에서 열린 코첼라 무대에 올랐다. K-팝 그룹 최초로 간판 공연인 헤드라이너 무대를 장식했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사진=YG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콘텐츠 성공 공식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박은빈 주연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신드롬급 흥행에 성공했고 올 초에는 여성 중심의 서사를 그린 송혜교 주연의 드라마 ‘더 글로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더 글로리’의 인기는 김희애와 문소리 씨가 투톱으로 연기하는 여성들의 정치 드라마 ‘퀸메이커’가 바통 터치해 K-드라마의 위상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이 활동을 중단한 가요계도 걸그룹이 K팝의 리더 자리를 이어 받았다. 블랙핑크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북미 최대 음악 축제인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트 페스티벌’에서 K팝 아티스트 중 처음으로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한국의 뮤직 플랫폼인 멜론 주간 성적표의 톱10은 아이브·블랙핑크 지수·뉴진스·스테이씨·윤하·엔믹스 등 걸그룹 및 여성 아티스트들의 곡이 아홉 개나 걸렸다. 다른 한국 음원 차트도 상황은 비슷하다. 역주행 신화를 쓴 하이키, 빌보드싱글 50위에 든 파워 루키 피프티피프티도 모두 걸그룹이다.

뮤지컬·연극에도 여성 서사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파혼한 여성 주인공이 사회의 편견을 뚫고 작가로 성공하는 이야기를 담은 ‘레드북’, 가족과 가정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했던 중년 여성들이 무대 위로 나온 ‘다시, 봄’, 미국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실화를 토대로 재창작한 ‘실비아, 살다’, 1950년대 여성 소리꾼들의 꿈과 성장을 다룬 창극 ‘정년이’ 등이다.

여성 주연의, 여성 서사의 콘텐츠를 무대 위로 끌어올린 퀸 메이커는 누구였을까

첫째는 시대적 변화다. 2000년 초반만 해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50%가 넘지 못했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00년 경제 활동 참가율은 여성 48.8%, 남성 74.4%를 기록했다. 마의 50% 기록을 깬 것은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부터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2015년 51.9%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50%를 넘어섰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국내외에서는 여성들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는 2014년부터 페미니즘 물결이 거셌다. 당시 유엔 여성의 친선 대사로 위촉된 할리우드 배우 엠마 왓슨 씨는 성평등을 위해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히포시(HeForShe)’ 캠페인을 이끌며 전 세계 남성들에게 성평등을 위해 행동할 것을 독려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유명 배우들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고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작품이 여성으로 바뀌는 젠더 스와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강인한 여성 캐릭터인 여자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분)를 메인 캐릭터로 내세운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남성 4인조에서 여성 4인조가 주연이 된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에서 여성 서사의 확대로 이어졌다. 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는 “대중문화계의 성불평등을 비판하고 여성 서사를 열망하는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2016년에는 지상파에서 무려 8년 만에 정규 여성 버라이어티가 등장했다. 개그우먼 김숙 씨를 주축으로 한 KBS의 여성 예능 ‘언니들의 슬램덩크’다. 극장가에서는 여성 주연의, 여성 서사의 영화 ‘아가씨’가 흥행에 성공했다. 왜 여성에 대한 작품을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박찬욱 감독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남성들의 재단된 시각에 맞서게 되고 그 틀에 대항하는 용감한 여성을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현실에서도 그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남성 서사의, 남성 주연의 콘텐츠가 주를 이룬 시기에 감지된 변화였다.

제작자와 소비자의 변화

뉴진스. 사진=어도어 제공

작은 변화는 큰 물결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특히 콘텐츠 공급자와 주소비층이 변하기 시작했다. 여성 소비자들의 입김이 커졌고 1990년 중반부터 사회 활동을 시작한 여성 제작자들은 하나둘 별을 달기 시작했다. 2021년 기준으로 1000명 이상 민간 기업의 여성 임원 수는 2015년보다 1.8배 증가했고 여성 임원 비율은 8.7%에서 11.5%로 2.8%포인트 높아졌다. 여성 관리자의 비율은 공공 기관 20.7%, 지방 공기업 7.4%, 민간 기업(500명 이상) 23%로 전년보다 모두 상승했다. 여성의 사회적 파워가 세진 것이다.

걸그룹 뉴진스도 여성 제작자의 시각에서 탄생했다. 1979년생의 민희진 어도어 최고경영자(CEO)는 2002년 SM엔터테인먼트 공채로 입사한 후 15년 뒤인 2017년 SM엔터테인먼트의 등기이사가 됐다. 민 CEO가 SM엔터테인먼트를 떠나 하이브에 둥지를 튼 것은 2019년이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민 CEO의 탁월한 브랜딩 능력을 믿고 하이브 브랜드최고경영자(CBO)로 임명했고 레이블인 어도어를 맡겼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이 2022년을 강타한 걸그룹 뉴진스다. 소녀들에 열광한 것은 K팝 시장에서 구매력이 가장 높은 2030대 여성들이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더글로리’, ‘퀸메이커’ 등 최근 화제를 모은 작품도 공통점이 있다. 극본을 쓴 이들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정서경 작가는 ‘2022 벡델데이’에서 “저는 (여성 이야기에) 이유 없이 주목한다. 제가 시나리오를 쓸 때 살아온 삶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장 편한 관점”이라며 남성은 남성 이야기를, 여성은 여성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익숙한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여성으로서 여성 캐릭터를 그릴 때 누구나 그러하듯이 부족함이나 결함을 드러내려고 하고 그러한 상태로도 사랑받기를 원한다. 아름답고 착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캐릭터여도 성장의 여지가 있는 상태로 보여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성 서사의 드라마들은 여성의 삶을 다양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는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든 한국의 여성 주도적인 이야기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시대에 뒤떨어진 고정관념을 깨면서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콘텐츠의 주소비층인 여성들의 직업이 변화하면서 콘텐츠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2021년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하는 여성 공무원의 비율은 48.1%로 절반에 육박했다. 특히 지방직 7급 공채 여성 합격자 비율은 53%를 넘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변호사 또한 신규 등록자 중 여성 비율은 2009년 27.7%에서 2018년 41.4%로 증가했다. 국회의원은 제21대 총선에서 57명의 여성이 배지를 달았다. 지역구 여성 당선자는 총 29명으로 역대 최대 수준이다. 제15대 국회인 1999년에는 299명 중 9명으로 3%에 불과했다.

여성의 삶의 배경이 가정에서 사회로 옮겨 가면서 더 다양한 이야기를, 더 다양한 여성을 보기를 희망했다. JTBC 드라마 ‘대행사’는 대기업에서 최초로 여성 임원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뤘고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는 타협을 모르는 인권 변호사와 재벌가의 방패막이로 살아온 전략가의 정치 게임을 여성 투톱으로 다뤘다. 또 20년 만에 레지던트 복귀하는 경력 단절 주부의 도전기 ‘닥터 차정숙’, 공금 횡령과 불륜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성의 이야기 ‘종이달’, 청부 살인업계의 전설적인 킬러이자 중학생 딸을 키우는 싱글 맘 ‘길복순’ 등의 작품 역시 사회로 나온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반면 여성 서사의, 여성 주연의 콘텐츠가 확장되고 깊어지는 동안 남성 서사의, 남성 주연의 콘텐츠는 큰 변화를 보지 못했다. ‘마동석’으로 대표되는 한국 영화 특유의 남성 캐릭터는 충무로에서 오랜 기간 흥행 보증 수표로 활약했지만 빛을 잃어 가고 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형성된 수많은 선택지는 식상함을 탈피할 출구를 만들어 준 셈이다.

물론 여성 서사라고 식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부 작품들은 그런 비판을 받았다. 뻔한 전개, 어디선가 본듯한 결말 등이다. 그럼에도 새롭게 보이기에 성공했고 여성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보다 프로페셔널리즘에 집중한 것이 장벽을 낮췄다는 평가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앤절라 킬로렌 CJ ENM 아메리카 CEO는 2022년 5월 19일 미국 스탠퍼드 한국학 콘퍼런스 20주년 행사에서 “한류가 전 세계에 통한 것은 ‘여성의 시선(female gaze)’에서 이전에 없던 시장을 창조했기 때문”이라며 “한류 이전에는 그 누구도 여성 소비자 특히 젊은 여성 소비자의 시선으로 이들을 위해 콘텐츠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류 이전에 (해외 콘텐츠에서) 여성은 얼마나 섹시한지, 남자는 얼마나 나쁜 남자인지 등이 중요했다”며 “K팝과 K-드라마를 통해 여성 소비자들이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로맨스 등 새로운 감정을 충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보수적인 국가로 꼽히는 중동 등에서도 한류가 인기를 끌고 있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여성 서사의, 여성 주연의 콘텐츠가 흥행에 안전하다는 인식이 대중문화 전반에 스며들면서 여성 서사 콘텐츠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성공 요인은 콘텐츠 소비자의 절대 다수인 여성들의 지지와 공감이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공연 티켓 구매자 중에서 여성이 73.2%로 압도적 다수였다. 특히 2030대 여성이 47.1%로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 팬덤의 구매력을 겨냥해 남성 배우를 캐스팅했지만 최근에는 여성 팬덤의 구매력을 겨냥해 ‘여성 서사’, ‘여성 주연’의 극을 올리는 추세다.


사회적 고정관념

물론 한계도 있다. 영화 시장이 대표적이다. “다섯째, 여섯째에서야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성 배우들이 제가 보기에 민망한 장면을 연기하러 나온다”고 말한 정서경 작가의 인터뷰 역시 불과 지난해 9월의 일이다.

최근 ‘SBS 8 뉴스’가 오스카 여우 주연상을 받은 량쯔충 배우의 수상 소감에서 ‘여성’이란 단어를 빼 비판을 받았다. 량쯔충은 ‘여성 여러분들에게 전성기는 지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세요’라고 말했지만 SBS는 ‘여성 여러분(And ladies)’을 자막뿐만 아니라 음성에서도 편집해 삭제해 버렸다. 

최근 공개된 영화 ‘바비’ 포스터도 구설에 올랐다. 포스터를 공개한 워너브라더스 코리아가 ‘바비는 모든 것(Barbie is Everything)’이라는 포스터 문구를 그냥 ‘바비’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냥 켄(He is just Ken)’이라고 소개된 문구는 ‘켄’으로 바꿨다. 1959년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8등신 미녀에서 현재 5개의 체형, 22가지 피부, 94가지 머리 색, 13가지 눈동자 색까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된 바비의 정체성이자 영화의 메시지를 나타낸 문구를 수정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원성을 샀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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