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사후 50년, '여성혐오'로 추락하는 위상[PADO]
[편집자주] 올해는 피카소 사후 50주년입니다. 20세기 미술의 거장의 50주기이니만큼 성대한 회고전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해외의 분위기는 사뭇 가라앉아 있습니다. 이전에도 그를 따라다니던 여성혐오와 문화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문제 때문입니다. 피카소의 흔들리는 명성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의 고참 미술 평론가 잭키 불슐래거가 3월 29일 쓴 기사를 요약 소개합니다.
"변화무쌍하고 천재적으로 70년간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문구는 피카소가 사망한 1973년 4월 8일 그 다음날에 실린 뉴욕타임스 부고기사 헤드라인이었다. 뒤이어 1980년에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은 기록적으로 10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피카소는 엄청난 천재였다"고 그 회고전의 큐레이터인 윌리엄 루빈은 말했다. "현대 미술에서 사실상 피카소가 만들어내거나, 실천하지 않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적어도 어디에든 그의 영향이 닿아 있다."
이제 누구도 피카소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저명한 화가인 피터 도이그와 세실리 브라운과의 대화를 할 때도 피카소의 이름은 마티스나 마네보다 적게 언급되었다. 어쩌면 피카소의 영향력이 이전 세대들에 너무 깊이 퍼진 탓에 더 이상 받아들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영향이 이미 널리 자리를 잡아 이제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이래 서양 미술을 지배했던 환영주의에 대한 도전과 다름아니었던 입체주의의 3차원 시각 공간의 '열어젖힘'은 이후의 모든 구상화에 대한 가능성들을 바꿔놨다.
다른 한편, 1960년대, 1970년대의 <총사(銃士)> 시리즈 같은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연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피카소의 만년작은 마티스의 컷아웃1 작품들 만큼 영향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 구상화는 1973에 비해 그 입지가 좁아졌다. 오히려 추상과 개념주의2와 같은 다른 계보들이 두드러졌다. 2004년, 500명의 예술가들과 큐레이터들은 마르셀 뒤샹의 소변기로 만든 <샘>을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미술작품으로 꼽았다.
뒤샹과 피카소는 비단 형식상으로만 대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중에 파는 기성품인 변기는 은연중에 퀴어 문화를 응원하는 것이었기에 "동성애자인 예술가는 남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가일 수 없다"라는 피카소의 신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피카소 또한 여성이 예술의 주요 주제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여성은 본질적으로 고통을 겪는 기계"라고 말했다. 그림 자체의 훌륭함이 어떻든간에 그 그림을 뒷받침하던 그러한 믿음은 오늘날 그 그림들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시선을 혼란케 한다. 최근 2018년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서 개최된 대규모 피카소 헌정 전시 <피카소 1932>가 그 대표적인 예다.
피카소의 어린 연인이었던 마리-테레즈 발터를 그린 누드작품들과 그뤼네발트의 작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Crucifixion)>에 영감을 받은 이미지들은 피카소의 평생 프로젝트였던 재현적인 회화를 자극적으로 만들어 생명력을 불어넣은 작업(형태를 장난스럽게 가지고 놀면서 경탄을 자아내게 하고 그로테스크한 왜곡으로 인해 야만성이 돋보이는 작업)이 여전히 참신하고 매혹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2018년 전시의 도록에서 저명한 피카소 연구자인 TJ 클락은 1980년 뉴욕 전시 큐레이터 루빈의 승리를 선언하는 듯한 표현과는 거리가 있는 논지를 펼쳤다. "피카소의 괴물 같은 그림들은… 그 괴물 같은 성격이 너무 사실적이면서도 일상적인 성(性)의 세계를 미화시키려고 시도" 했다고 인정하면서도, 피카소 회화의 모호성과 진실을 옹호했다. 괴리감을 주는 피카소의 인위적 요소가 "여성 주체성"의 여지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클락은 "피카소의 1932년 누드작품 두 점이 없었다면 세상이 더 나아졌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조심스러운 어투로 글을 마무리 지었다.
놀랍게도 상황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넷플릭스의 2018년도 스탠드업 코미디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에서 해나 개즈비는 17세 발터와 연인 관계였던 피카소를 비난하며 그를 트럼프, 하비 와인스틴에 빗댔다. 유럽과 미국(영국 개최 전시회는 없다)에서 피카소 사망 50주기를 추념하여 열리는 50여개의 전시들을 종합한다는 의미에서 개즈비는 올해 6월 미국 브루클린 뮤지엄의 <피카소 1972~2023>전시를 기획한다. 이 전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많은 젊고 다양한 뮤지엄 방문객들이 여성혐오, 남성성, 창의성과 '천재성'이라는 상호연결된 이슈들에 대해 제기하는" 물음들에 대답할 것이라고 한다.
<피카소 1972-2023>전은 현재 그의 명성이 얼마나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지 보여준다. 다작을 한 피카소쯤은 되니 동시에 수많은 전시가 개최될 수 있는 것이겠지마는, 그렇다고 메이저급 전시는 없다. 대부분 소규모에 좁은 주제의 전시다. 파리의 퐁피두센터는 드로잉 전시를 연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그의 1921년에 제작된 네 점의 기념비적 작품들을 모아 <퐁텐블로의 피카소>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한다. 안전하게 피카소를 고야, 벨라스케즈, 그리고 엘 그레코 같은 거장들과 묶어서 개최하는 몇몇 전시들도 있다. 이 여러 작은 전시들이 동시에 개최된 결과를 한마디로 말할 것 같으면, 백인 남성 천재성이 너무 많이 보이는 것이 당황스럽게 되는 우리의 현 시대에 맞게 피카소가 작은 사이즈로 축소된 채 조각조각 보여지게 된 것이다.
마음만 먹었다면 뉴욕 현대미술관은 엄청난 회고전을 열거나 질문을 던지는 기획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아프리카 조각에 영감을 받아 성 노동자들을 야만적으로 그려내어 입체주의의 서막을 알린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소장하고 있다. 이 작품이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 여성혐오적일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문화의 도용했다고 비난 받아 이제는 위험물이 되어버린 이 간판 소장품을 뉴욕 현대미술관은 몸을 사려 회고전 같은 기획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Musee Picasso)은 <아비뇽의 처녀들>에 에두른 경의를 표한다. 페이스 링골드3 전시에서 <피카소의 작업실>이라는 테피스트리 작품은 피카소가 흑인 모델을 앞에 두고 작업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작품 주변의 텍스트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우리 흑인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다. 내가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인의 얼굴에서 가져온 아프리카인의 마스크이다…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부인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이 진실이다."
예술을 예술가로부터 떼어내는 게 이렇게 쉽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피카소는 스스로 그의 그림들이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자전적인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피카소의 삶이 어떻게 그의 그림에 녹아들었는지를 파헤친 존 리차드슨의 피카소 전기에 용기를 얻어 우리는 오랫동안 피카소의 그림들이 그의 성적(性的) 경험을 원동력으로 한 것이라고 봐왔다. 피카소를 흠모했던 연인들인 그의 특정 시기를 만들어 냈다가는 그 다음 창작기의 흥분 속에서 버림받았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입체주의의 뮤즈로, 도라 마르는 전시(戰時)의 <우는 여인>으로 피카소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연애관계는 상호 동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피카소가 45세일 때 17세로 사귀었던 마리 테레제 발터까지도 심지어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딸은 2019년에 나온 회고록 <피카소와 마야>에서 피카소를 애정 넘치는 가정적인 남자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피카소는 열세 살짜리와 성관계를 가진 고갱의 영역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의 훌륭한 작품들은 인간 제물을 필요로 했던거죠"라고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는 말했다. "그는 (말하자면) 그의 각 작품들에 서명할 때 찍어바를 피를 필요로 했던거죠." 피카소가 사망한지 사 년이 지난 어느 날 발터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피카소 작품 딜러인 다니엘-헨리 칸베일러는 <검은 안락의자 안의 누드>를 자랑하며 "여자를 살해한 난봉꾼이 그림을 그렸을 것 같은 느낌이죠"라고 말했다. 이러한 류의 말이 이제는 문제가 되는 피카소의 '마초 전설' 담론을 형성한다. 클락은 런던 테이트 미술관 전시 도록에서 "남성들은 나체의 시신을 두고 칭찬을 주고 받았다"고 개탄했다. 린다 노클린은 피카소가 "여성 누드에 탐닉하면서 실제의 여성들을 폄하했다"고 주장했다.
발터를 게걸스럽게 소비하는 21세기 미술 시장과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매칭시킬 수 있을까? 피카소의 최고가 그림 열 점 중 2010년, 2015년, 2018년, 그리고 2020년에 판매된 네 점은 발터를 그린 것이다. 하렘을 묘사한 <알제의 여자들>(2015년 1억7940만 달러(약 2400억 원)에 낙찰)에 이어 아홉 점의 그림이 여성들을 담고 있다. 입체주의가 제공하는 지성의 게임들이 에로틱한 황홀경과 뒤섞인 장식적 화려함으로 녹아든다는 점에서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기에 끈질긴 매력을 품고 있다. 피카소는 "나는 육체의 고뇌를 강조하고 싶었고…시간의 변화에 따른 변화의 첫 신호에 겁먹은 육체의 아름다움…" 이라며 그가 여자를 그리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결국 섹스와 죽음이 그에게는 영원한 주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리차드슨이 "즉각적 연민"과 "때로는 가학적인 에로티시즘"이라고 칭한 두 가지 사이의 '밀고 당기기'다. <검은 안락의자 안의 누드>에서 발터는 황홀함에 빠진 듯 누워있는데, 머리는 뒤로 젖힌 채, 묶은 머리카락은 소용돌이치는 성기모양이고, 완벽한 자줏빛 원형의 가슴에 흰색 동물발톱이나 가시 돋친 꽃처럼 보이는 손, 검은색 속에 안치된 듯한 인물이 인상적이다. 피카소는 말했다. "안락의자에 있는 여성들은 늙었거나 죽음을 의미하는 거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녀에게는 안됐지만요. 아니면 오히려 그녀에 대한 보호가 될지도요."
캔버스 위에 그려진 여성들의 신체에 대한 피카소의 현란한 왜곡은 사실적으로 느껴지고, 사실상 그들의 신체에 대한 착취와 다름없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고, 시각적 창작이다. 피카소가 발터를 그린 것처럼 보이는 형태들을 가지고 어떻게 <게르니카(Guernica)>를 가득 채운 고통에 빠진 사람들로 변형시켰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해진다.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그 흑백의 창작물 속에서 입체주의의 무너져버린 공간은 공포가 지배하는 무너져버린 세상이 된다.
그의 청색 시대에 나오는 방랑자들에서 시작해 만년의 해골을 닮은 자화상들에 이르는 긴 시기 동안 피카소는 1900년-1970년 기간을 장식한 위대한 비극적 예술가였다. 필립 랄킨은 피카소와 여타 모더니스트들을 "20세기의 무책임한 단면"이라며 힐난했다. 이 힐난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면 좋을 것 같다. 피카소는 성적 역할에 대한 것을 포함한 그 세기의 무책임, 폭력, 불안을 시각적으로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고. 그는 우리 역사의 일부이다. 모든 세대는 그와 협상을 해야 하는데, 그 협상의 결과가 우리에게 비단 피카소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김수빈 PADO 매니징 에디터 subin.k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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