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용산에서 들려오는 참모들의 ‘이상한 보좌’ 뉴스
모시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표 써 놓고 옷 벗을 각오로
보좌해야 하는 게 참모의 숙명이다
9·11 테러 주범 오사마 빈라덴은 2011년 미군 특수부대에 사살됐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오바마 대통령과 미 정부 수뇌부는 백악관 지하 워룸에서 대원들이 보내오는 생중계 영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현장을 찍은 유명한 사진이 있다. 오바마는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화면을 응시하고 부통령과 국방·국무장관 등이 둘러서 있다. 가운데 상석을 차지한 것은 제복 차림의 준장급 현역 군인이었다. 이 사진은 탈권위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유명해졌지만 나는 여기서 미국의 힘을 느낀다. 권력자를 미화하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위기 대응 리더십의 권위를 높이는 효과를 냈다. 계급·서열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 이상으로 국민 신뢰를 얻을 방법이 어디 있겠나.
수단 교민 구출 작전이 전개될 때 윤석열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향하는 전용기에 있었다.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윤 대통령이 기내에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이 실시간으로 화상 회의를 주재해 상황 보고를 받으며 탈출 직전까지 상황을 지시했다”고 했다. 이 브리핑을 받아 많은 언론이 ‘진두 지휘’라는 표현으로 보도했다.
수단은 내전이 벌어지는 전쟁터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긴박한 작전 현장을 수천㎞ 떨어진 기내에서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제로 대통령이 실시간 공중(空中) 지휘에 나선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했다면 그게 더 위험하다. 아마 대통령은 ‘안전하게 구출하라’는 큰 지시를 내린 뒤 현지 작전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맞는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브리핑해도 좋을 것을 참모들이 욕심부리다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대통령을 ‘영화 속 히어로’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안보실 1차장은 미국과 조율되지 않은 발표로 논란을 불렀다. 한미 정상의 ‘워싱턴 선언’에 대해 “사실상 핵 공유”라고 브리핑했으나 미 백악관이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바람에 머쓱해졌다. 성과를 강조하려는 의욕이 지나쳐 도리어 불씨를 지핀 셈이 됐다.
방미 전 윤 대통령은 미국 신문 인터뷰에서 언급한 일본 관련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다. “저는 (중략) 일본이 100년 전 역사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일본에 과거사 면죄부를 준다는 뜻으로 읽혔고 야당 등에 공격 빌미를 주었다. 여당 대변인이 “주어가 잘못 오역됐다”고 방어했다가 원문이 공개돼 망신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윤 대통령의 진의는 충분히 이해된다. 오래전 일 때문에 언제까지나 미래를 발목 잡혀선 안 된다는 취지일 것이다. 이걸 놓고 “일본 대변인” 운운하며 친일 프레임을 씌우는 야당의 공격은 참으로 구태의연하다. 그렇다고 대통령으로서 바람직한 발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해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 부족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발언은 과거를 뭉개고 싶은 일본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소지가 있다. 안 하는 게 나았다.
문제는 그런 말이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나간 점이다. 대통령도 말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옆에서 참모들이 정정해주거나 오해가 없도록 기자에게 보충 설명을 해야 한다. 모든 장관, 모든 기업인이 언론과 만날 때 다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인터뷰에 배석했을 안보실장이나 외교안보수석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손놓고 있었다. 참모들의 판단력이 부족하거나, 대통령 말에 토달 분위기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윤 정부 국정은 높이 평가받을 부분이 많지만 이런 실수가 반복되면서 지지율을 까먹고 저평가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날것 그대로 대통령 발언이 거친 표현으로 공개되는 경우가 잦다. 여당 전당대회 때 대통령이 비윤(非尹) 후보를 향해 “국정 운영의 훼방꾼이자 적”이라 했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대통령이 적대적 언어로 당대표 선거에 직접 개입한 모양새가 됐다. 이 발언은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보도됐는데,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참모라면 말렸어야 했다. 더 정제된 표현, 더 세련된 전달 방식을 취하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했어야 옳다.
방미 셋째날 미 의회 연설에 나선 윤 대통령은 시종 자신감이 넘쳤다. 우리 대통령이 글로벌 무대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활약하는 모습을 얼마 만에 보나 싶다. 윤 대통령은 강렬한 성공 체험을 가진 사람이다. 문 정권의 핍박을 이겨내고 정치 입문 1년 만에 거침없이 대권까지 거머쥐었으니 내가 옳다는 믿음이 확고할 수밖에 없다.
자기 확신이 강한 대통령을 모시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옆에서 쓴 소리, 싫은 소리 해야 하는 게 참모의 숙명이다. 사표 써 놓고 언제라도 옷 벗을 각오로 보좌하지 않으면 국정을 발목 잡는 ‘용산 리스크’를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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