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박완서는 왜 화가를 ‘환쟁이’라 불렀을까
차별용어니 개정판 내야할까
‘PC’ 진절머리 내는 사람 많아져
좀 더 겸손하고 친절해져야
한국 소설 문학의 거장 박완서 선생의 데뷔작 <나목>은 6·25 전쟁 직후 서울이 배경이다. 주인공 ‘나’는 손수건에 초상화를 그려 미군들에게 파는 백화점 코너 판매원이다. ‘나’는 같이 일하는 화가들을 ‘환쟁이들’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그들 중 한 명인 옥희도(화가 박수근이 모델)가 해방 전 미전에서 특선을 했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 사람은) 진짜 화가란 말이군요?” 대회에서 상 받은 정도라면 예술가 대접을 하겠지만 초상화 그려 파는 화가들은 환쟁이라는 멸칭으로 불러도 된다는 의식이 엿보여서 오늘날의 감수성으로는 불편해지는 대목이다.
나목이 발표됐던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환쟁이’처럼 특정 직업을 비하하는 말에 별로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서 한시대를 이끌어간 위대한 작가 박완서조차도 소설 안에 이런 단어를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지금 2020년대 소설가라면 ‘환쟁이’라는 단어를 절대 작품 안에 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요즘 젊은이들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어서 환쟁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1970년대에는 인권을 화두로 고민하느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조차도 특정 직업이나 약자에 대한 비하 호칭을 일상에서 무심코 썼다. 한편 오늘날은 인권운동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런 말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는 세상이다. 시대가 이렇게 달라지게 만든 흐름이 바로 PC(Political Correctness :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를 바로잡는 운동)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 흔히들 서빙 직원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생활 속 PC 현상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PC의 수혜자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항상 강자인 사람은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한 명 걸리기만 걸려보라고 모두 벼르며 사는 것 같은 나라, 다들 폭발하기 직전인 듯 성이 나 있는 이 한국 사회. 여기서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는 예의’인 PC마저 없었으면 얼마나 더 살얼음판 같이 피곤했을지 상상해보자.
그렇건만 많은 이가 PC라면 진절머리가 난다고 한다. ‘PC충들은 선비질 그만하라’는 비아냥이 난무한다. 대체 왜 그런 걸까. 강준만 교수는 저서 <정치적 올바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현대사회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무대로 누가 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지 겨루는 전쟁터가 되어버렸다고. 이곳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종종 타인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강조하는 PC이건만 자칫 지나치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은 ‘지적질’이 된다는 것이다.
박완서의 <나목> 속 ‘환쟁이’는 잘못되었으니 ‘화가’로 바꿔서 개정판을 내야 한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도덕적 올바름을 과시하는 오만한 지적질이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 한편 친절하고 영리하게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PC주의자라면 전쟁과 가족의 사망으로 모든 것을 잃고 소녀 가장이 된 주인공이 자신이 속한 일터와 동료들을 통틀어 비하하는 방식으로 좌절과 상처를 표출하는 맥락을 읽어낼 것이다.
지금 우리가 1970년대 소설 속 ‘환쟁이’를 낯설게 보듯이, 수십년 후에 2020년대의 한국 사회를 돌이켜 볼 때에는 동성애 인권운동을 못마땅해하고 다문화주의를 뜨악해하는 일부의 시선을 구시대 유물처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게 될 것이다. 백래시(사회 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발 심리와 행동)가 간혹 있겠지만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는 개인 인권 확장이라는 방향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겸손하고 친절한 PC주의자들이 많아진다면 그 수레바퀴는 더 원활하고 빠르게 구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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