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라는 다큐에… “오바마는 백인, 북극곰은 흑곰?”
넷플릭스 역사 다큐 논란
’PC주의’ 향한 반발로 확산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흑인이라고요? 그럼 오바마 대통령을 백인이라고 해도 됩니까?”
5월 1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역사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예고편에서 흑인 여성주의 학자인 셸리 헤일리 미 해밀턴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제 할머니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학교에서 뭐라고 하든 난 신경 안 쓴다.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었어’.” ‘퀸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맡은 이는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자 그리스 혈통 백인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라를 흑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고증이 생명인 다큐에서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묘사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으로 시작한 논란은 서구권 미디어 콘텐츠에 만연한 ‘PC주의(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거센 비난으로 번졌다.
◇그리스계 백인 클레오파트라가 흑인?
‘퀸 클레오파트라’의 감독 티나 가라비는 언론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백인)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한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나는 그때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클레오파트라의 피부색이 그렇게 하얗던가?”라고 한 뒤, 수차례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시사했다. “왜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어선 안 되나” “왜 어떤 사람들에겐 그녀가 백인이어야 하나” “확실하진 않지만 그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백인은 아니었을 것” 등이다. 가라비는 새 작품의 의미에 대해 “할리우드가 그녀에게 가한 억압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백인이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51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는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이다. 그리스계 백인 혈통인 데다, 근친혼을 한 왕조이기 때문에 흑인일 가능성은 낮다. 과거 일각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어머니가 이집트 출신이라고 주장하며 흑인 혈통이 섞였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지만, 이 역시 ‘이집트인은 무조건 흑인’이라는 편견을 반영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집트 고대유물관리청 장관을 지낸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는 “넷플릭스의 주장은 완전한 허구”라며 “클레오파트라는 금발의 그리스인”이라고 일축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외양을 묘사한 조각상, 그림, 동전 등 고대 유물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기원전 744~656년 이집트를 통치한 제25왕조를 제외하면 흑인 문명은 이집트와 아무 관련이 없다면서 “넷플릭스는 이집트 문명의 기원이 흑인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혼란을 조장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퀸 클레오파트라’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미국 흑인 사회의 일부 사람이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했다.
아랍뉴스 편집장인 파이잘 아바스도 칼럼을 통해 “(’퀸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역사적 아이콘을 현재 미국 분열의 진흙탕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적인 시도”라고 비판했다. 이집트 검찰에는 ‘퀸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 역사를 왜곡했으므로 이집트에서 넷플릭스 서비스 접근을 차단해달라는 고발장이 접수됐고, 국제 청원 사이트 ‘체인지’에는 “이집트 역사가 아프로센트리즘(Afrocentrism·흑인중심주의)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며 공개를 막아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논란은 전 세계로 뻗어갔다. 유튜브에 올라온 ‘퀸 클레오파트라’ 예고편 영상은 ‘좋아요’가 2만7000여 건인 데 반해, ‘싫어요’ 수가 33만건을 넘어섰다. “넷플릭스는 역사 수업을 다시 받아야 한다” “이집트인으로 너무 화가 나 할 말을 잃었다” “미국 흑인 사회가 타국의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바꾸고 있다”는 비판 댓글이 달렸다.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이순신이 흑인이었다고 주장하는 격” “중국이 한복을 자기들의 문화라고 하는 것과 같은 ‘역사 빼앗기’다”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콘텐츠도 범람할까 두렵다” 등이다.
◇흑인 일론 머스크, 백인 칭기즈칸, 검은 북극곰?
이번 논란은 서구 문화계의 ‘블랙워싱(blackwashing·흑인화)’ 이슈를 소환했다. 블랙워싱은 과거 유색인종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연기하던 ‘화이트워싱’의 반대 개념. 흑인이 아닌 캐릭터를 흑인으로 바꾸는 것을 일컫는다. 2010년대 들어 거세진 ‘PC 열풍’이 블랙워싱 현상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완전한 창작물은 물론이고 실존 인물을 다루는 다큐, 시대극에도 블랙워싱이 나타났다. 디즈니는 원작에서 백인으로 표현한 캐릭터에 유색 인종 배우를 캐스팅하는 실사화 영화를 여럿 만들고 있다. 흑인 인어공주, 흑인 팅커벨, 라틴계 백설공주 등이 예고돼 세계적으로 논란이 일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은 1800년대 영국 상류사회가 배경인데 흑인 귀족이 등장했고, 드라마 ‘바이킹스 발할라’에는 실존 인물인 백인 남성 ‘야를 호콘’의 이름을 가진 캐릭터에 흑인 여성 배우를 캐스팅했다.
무분별한 블랙워싱은 원작을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온다. ‘보여주기식 PC’,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비판도 있다. 흑인 실존 인물을 백인화하는 데 대한 흑인 사회의 거센 반발을 지적하며 ‘내로남불’을 꼬집는 이들도 있다.
비판은 조롱으로 진화했다. 트위터와 레딧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흑인 유명 인사들의 가상 전기 영화 포스터에 백인 배우의 얼굴을 합성하는 밈(meme)이 퍼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의 포스터에는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 라이언 고슬링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포스터에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박사로 유명한 앤서니 홉킨스가 등장하는 식이다. 테슬라와 트위터의 CEO인 일론 머스크와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를 유색 인종으로 표현한 포스터도 나왔다. 넷플릭스의 다음 다큐는 ‘흑인 히틀러’ ‘백인 칭기즈칸’ ‘검은 북극곰’이 될 것이라는 풍자도 있다.
김교석 문화평론가는 “PC주의는 지난 5~6년 동안 미 할리우드 등 대중문화계를 휩쓸었는데, 이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임계점에 다다른 게 아닌가 싶다”면서 “(’퀸 클레오파트라’를 둘러싼) 이번 논란은 충분한 사료와 근거보다는 (정치적) 의식에서 비롯된 주장을 다큐멘터리화하는 것에 대한 미디어 수용자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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