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정원도시, 그 이후
전남 순천에서는 국제정원박람회(10월 말까지)가 열리고 있다. 지난 주말, 그곳을 찾았을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원을 즐기고 있었다. 시내를 가로질러 순천만으로 빠져나가는 하천 양쪽의 넓은 땅에는 나무, 풀, 꽃으로 가꾼 아기자기한 정원과 호수, 개울, 온실, 그리고 한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스페인, 중국, 일본 등 다양한 국가 정원이 조성됐다. 위치상 도심과 해안을 연결하는 중간지대인 셈이다. 방문객 중에는 연인, 가족, 단체로 온 노장층이 눈에 띄었다. 특히 초로의 여성들은 정원박람회의 주인공이었다. 꽃들 사이에 쪼그려 앉거나 심지어 나란히 엎드려 턱을 괴고 사진을 찍는 장면은 영락없이 10대 소녀 시절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목표 방문객이 800만명인데 한 달도 안 돼 200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인간이 상상하는 낙원은 정원이라 한다.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살던 곳도 정원이고, 동양의 무릉도원 역시 정원이다. 임사체험을 했던 사람들이 고백하는 천국 역시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정원의 모습이다. 대부분 아파트에 사는 우리에게는 정원보다 공원이 익숙한데 공원이 공공의 장소인 데 비해 정원은 훨씬 오래되고 인간과 가깝고 친숙한 곳이다. 자연에 가해진 인간의 힘은 농토와 정원을 일과 휴식이라는 리듬으로 구성해왔다.
지난 24일 열린 ‘순천국제에코포럼’에서는 흥미로운 발표를 접했다. ‘자연과 사람: 염소, 정원사, 혹은 보호자?’라는 제목으로 영국 신학자인 데이브 브클리스 박사가 들려준 내용이다. 성경에서 사람은 지구를 지키고 가꾸는 청지기로 부름받는다. 그러나 지구를 지배하는 오만한 주인의 자리에 앉은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가이아 가설의 주창자인 제임스 러브록은 “인간이 지구의 청지기가 되기를 바라기보다 차라리 염소가 정원사로서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관념은 지역, 문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조지나 메이스는 ‘자연 그 자체’ ‘사람보다 자연’ ‘사람을 위한 자연’ ‘사람과 자연’이라는 네 가지로 정리했다(2014년 사이언스지). ‘자연 그 자체’와 ‘사람보다 자연’은 생태중심적 사고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람보다 자연’은 사람을 지구의 기생충으로 바라보거나 지구의 절반에서 사람이 철수해야 한다는 반구제(半球制) 주장처럼 좀 더 나아간 생각이다.
우리는 ‘사람을 위한 자연’이라는 관념에 젖어 있지만, 지금은 ‘사람과 자연’, 더 정확하게는 ‘자연 속의 사람’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자연 속의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의 여느 지방 도시처럼 순천에는 다양한 시대가 중첩돼 공존한다. KTX 순천역에 내리면 원도심이다. 자동차들이 돌아가는 로터리, 낮은 건물마다 자리 잡은 음식점·빵집·카페 등 작은 가게들이 있고, 옛날 건물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나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청년몰에서는 도시재생의 노력이 느껴진다. 조금만 더 가면 국밥집이 즐비한 아랫장(시장)인데, 마침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시골 할머니들이 나물과 채소 등속을 바닥에 잔뜩 펼쳐놓았다.
해변 쪽으로 내려가다가 깔끔하게 정비된 신도심과 박람회가 열리는 국가정원을 만나게 되지만, 곧장 시간이 정지한 듯한 순천만이 나온다. 끝없는 갈대밭이 펼쳐진 갯벌에는 칠게와 짱뚱어가 살고 있고, 용산 전망대에 올라가면 고요한 남해가 펼쳐진다. “해는 이곳에 와서 쉰다”고 시인 곽재구가 노래했던 와온해변도 있다. 갈대밭 인근 순천문학관에서는 <무진기행>을 쓴 소설가 김승옥과 동화 <오세암>의 작가 정채봉의 눈에 비친 순천만과 그들의 문학세계를 소개한다. 차분한 자연에서 태어난 순정한 문학. 그런데 순천이 준 여운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 순천을 검색하자 뜻밖의 뉴스가 나온다. “생태도시, 정원도시의 성공을 바탕으로 5대 핵심전략 사업인 우주산업, 바이오, 디지털, ESG 경영, 웰니스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순천시의 야심 찬 청사진이다. ‘자연 속의 사람’이라는 가치가 ‘사람을 위한 자연’과 여전히 갈등하는 상황이다.
순천의 고민은 여느 도시와 비슷할 것이다.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인구를 늘리고 도시를 발전시키는 것. 그러나 우주산업, 바이오, 디지털보다는 진짜 정원도시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정원에서 출발해 도시를 만들었고, 이제 두 장소가 만나기 시작했다. 정원 같은 미래 도시는 경제보다는 아름다움이 우선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작고 느리다. 순천의 제1호 국가정원이 그런 본보기가 되면 좋겠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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