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글탱글한 주꾸미와 함께 사수는 소주 한 잔을 건넸다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3. 4. 2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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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주꾸미

상사가 퇴근을 하지 않으면 일이 없더라도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15년 전이었고 지금같이 산들바람 부는 봄날이었다. 그날 따라 부장이 일찍 자리를 떴다. 상무가 집안일로 칼같이 퇴근했기 때문이었다. 연쇄효과처럼 모두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옆자리 사수가 말했다. “약속 없지? 밥 먹으러 가자.” 질문이 아니라 통보였다.

무엇을 먹으러 가는지 말해주지도 않았다. 사수의 구형 XG그랜저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때도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았던 사수는 집에 일찍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뭐 먹나요?” “가보면 알아.” 질문은 단답형 답변에 가로막혔다. 창밖으로 한강 변의 상쾌한 바람이 느껴졌다. 사수는 라디오를 틀어 야구 방송을 들으며 말없이 운전만 했다. 강변북로를 달려 명일역 근처까지 왔다.

인천 서구 불로동에 있는 ‘서해바다 숯불구이 쭈꾸미’./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역 바로 앞에서 골목길 위로 오르더니 한쪽에 차를 댔다. 가로등만 군데군데 켜져 있던 골목길에는 불 켜진 가게가 드물었다. 그 한가한 거리에서 사람이 모인 가게는 딱 하나뿐이었다. ‘원조숯불쭈꾸미”라는 식당은 문을 활짝 연 채 사람을 받고 있었다. “봄이니까 주꾸미를 먹어야지. 인마.” 사수는 이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툭 던졌다. 메뉴 결정권은 아예 없었다. 가는 대로 가고 시키는 대로 먹을 뿐이었다. 불만은 없었다. 그런 쪽으로는 꽤 까다로운 사람이었기에 믿을 만했다.

이 집은 메뉴랄 게 없었다. 주변에 앉은 모든 이가 주꾸미만 먹고 있었다. 주인장이 후끈한 숯불을 올려줬다. 철망이 달아올랐다. 그 위에 양념 주꾸미를 올렸다. 센 화력에 주꾸미를 잘 뒤집어줘야 했다. “여기 타잖아.” 사수는 주꾸미 안부만 물었다. 주꾸미는 불길만 닿아도 익는 것 같았다. 빨간 양념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단맛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매운맛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뜨거운 불길에 살짝 그을린 주꾸미와 양념에 거친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

찬으로 열무 무김치를 곁들였다. 다가올 여름을 대비하는 듯 붉은 김치 국물에 속이 개운해졌다. 제철을 맞은 주꾸미는 전혀 질기지 않았다. 살이 통통했고 탱글탱글한 식감만 남아 먹는 행위 자체가 흥겨웠다. 말없이 주꾸미만 들척이던 사수의 얼굴도 서서히 풀려갔다. 주꾸미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듯 나에게 “야, 한잔 받아라” 말하며 소주잔을 건넸다. 오랜만에 생긴 저녁 시간에 남자 둘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도, 주꾸미를 몇 판째 시켜 먹고 있는 것도 괜찮았다. 골목길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았으니, 봄날에 주꾸미를 먹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동을 떠나 가야 할 곳은 서울을 가로질러 인천 불로동의 ‘서해바다숯불구이쭈꾸미’다. 오래된 아파트 상가 1층에 자리한 이 집은 나름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장사를 했다. 밤에도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15년 전 그때와 달리 직접 차를 몰고 강변북로를 서쪽으로 달렸다. 창문을 열자 민물 냄새가 몸에 배었다. 불로동은 아파트로 가득 차 있었다. 또 반듯한 상가 건물이 같은 간격으로 또박또박 열을 맞췄다. 멀리서 보면 멋 없어 보이는 흔한 아파트 단지였지만 하나하나 가게를 살펴보면 또 벌써 나름의 역사를 쌓고 있었다.

주꾸미를 먹으러 찾은 이 집도 그랬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주인장은 손님이 올 때마다 아는 사람을 맞듯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이곳에 들어오는 손님 대부분이 원래 앉던 자리가 있는 것처럼 익숙한 폼으로 의자에 앉았다. 주꾸미는 매운맛 정도에 따라 매운 것은 ‘양념’, 맵지 않은 것은 ‘주물럭’으로 구분했다. 숯불이 들어오고 열기가 얼굴을 달궜다. 숯 자체가 향을 내거나 혹은 독특한 맛을 만들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화력이다. 최고 450도 넘게 올라가는 숯불의 복사열이 빠르게 음식을 익힌다. 덕분에 빨리 익고 또 그 때문에 재료의 수분이 적게 날아간다.

이 집 주꾸미가 그랬다. 숯불 위에서 굴리듯이 빠르게 익힌 주꾸미는 통통 튀는 식감이었다. 이에 엉기거나 턱이 아프지 않았다. 입안에서 주꾸미가 뛰어다니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 식감을 든든히 받쳐주는 것은 양념이었다. 양념은 재료의 나쁜 부분을 숨기는 잔기술로 치부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집 양념은 그런 잔기술이 아니었다. 독주 가수의 무대에 코러스를 넣는 합창단처럼 빈 곳을 채우고 절정을 더 화려하게 마무리하는 장치였다. 맵지만 얼얼하지 않고 은근히 단맛이 느껴지지만 달다고 말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었다. 한 상을 거하게 구워 먹고 나니 처음 서울에서 주꾸미를 나에게 알려준 사수 생각이 났다. 그간 일만 하며 혼자 지내던 그가 4월의 마지막 주에 결혼한다고 알려 왔던 것이 얼마 전이었다. 절대로 후배에게 밥값을 내게 하지 않던 그 마음이라면 그도 누군가에게는 봄날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원조숯불쭈꾸미: 쭈꾸미 1만3000원, 생꼼장어 1만5000원, (02)3426-6731.

#서해바다숯불쭈꾸미: 쭈꾸미 주물럭 1만2000원, 양념 쭈꾸미 1만 2000원, 쭈쌈 1만3000원, (010)-9089-8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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