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앞당긴 ‘꼬마’와 ‘뚱보’
원폭 2발 맞고서야 백기
일본은 무엇을 지키려 했나
“6일 오전 8시경 적(敵) B-29 몇 대가 히로시마시에 내습(來襲)하여 소수의 신형 폭탄을 투하하였다. 이로 인하여 시내의 많은 가옥은 무너지고 시내 각처에는 화재가 발생하는 등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 적은 이 신형 폭탄을 사용하여 우리 무고한 민중을 살상하려는 미국민의 잔학성을 스스로 세계에 나타낸 것이다. () 이에 의하여 적 미(米)는 미래 영구히 ‘인류 정의의 파괴자’요 ‘사회 정의의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우리들은 정의에 있어서 이미 적을 이기고 있다. 일찍부터 우리는 적이 이런 유(類)의 폭탄을 사용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그 대책에 대해서는 조급히 당국에서 지시될 것이다.”(1945년 8월 9일 ‘매일신보’)
식민지 조선에서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최초 보도는 히로시마 상공에 버섯구름이 치솟은 지 사흘 뒤에야 이루어졌다. 기사 제목은 “적, 비인도의 광폭(狂爆)”.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조선일보·동아일보 두 민족지를 폐간한 것은 1940년 8월 10일이었다. 5년이 지났지만,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다름 아닌 조선어로 ‘가짜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1943년 조선인의 일본어 보급률은 22%에 불과했다.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조선어를 지구상에서 지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총독부로서도, 전시 총력전 체제에서 주민의 78%가 못 알아듣는 일본어로 조선인을 선동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신형 폭탄을 사용할 것을 일찍부터 예상했으며 그 대책이 조속히 지시될 것이라 보도했지만, 기사가 게재된 당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번째 원폭에도 일본은 속수무책이었다.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에서 20만여 명, 나가사키에서 10만여 명이 사망했다. 그중 10%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조선인이었다.
훗날 트루먼 대통령은 “두 발의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이 끝났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며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했지만, 전 세계에서 들끓는 반핵 여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정당한 여론이었지만, 적어도 일본만큼은 덩달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것도, 1941년 태평양전쟁을 시작한 것도 일본이었다. 자신이 시작한 전쟁에서 일본은 1937년 난징에서 20만명 이상 민간인을 학살했고, 1938년부터 5년에 걸쳐 충칭에 200여 차례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1945년에 접어들어 이오지마 전투(2월), 오키나와 전투(4월)에서 연전연패하며 궁지에 몰린 대본영은 ‘1억 옥쇄(玉碎·옥같이 부서지겠다)’를 각오로 ‘본토 결전’에 대비했다. 전쟁 물자가 부족해 소나무 뿌리를 짜서 항공유를 변통하고, 민간의 솥과 냄비까지 긁어모아 무기 공장을 돌려야 하는 처지였다. 대본영은 ‘결호작전(決號作戰)’을 수립하여 1만 대 이상의 비행기, 235만 명의 병력, 2800만 민간 의용대를 동원해 본토에 상륙하는 적을 격파할 것이라 허세를 부렸다. 미국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11월 1일 규슈에 최초 상륙할 병력은 76만6700명이며, 피해가 클 것이지만 공습만으로 일본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한 5월 이후, 대본영도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7월 26일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부가 전후 처리를 위해 모였을 때, 일본은 소련의 중재에 기대를 걸었다. 그해 4월, 소련은 일본에 4년 전 체결한 소일 중립 조약의 폐기를 통보했다. 하지만 일본은 “만료 1년 전 폐기 통고가 없을 때에는 5년간 자동적으로 연장된다”는 조항에 따라 조약이 1946년 3월까지 유효하다고 이해했다. 일본은 소련이 ‘독소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중립을 지킨 덕분이라 자부하면서, 소련이 종전의 중재를 약속하면 40년 전 러일전쟁 승리 때 획득한 뤼순, 다롄, 남만주 철도, 쿠릴열도 북부를 포기할 각오였다.
포츠담 회담을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조속한 종전을 위해 소련의 참전을 재촉하는 한편, 물밑 교섭에서 일본이 요구하는 ‘천황제’의 유지까지도 고려했다. 하지만 회담 하루 전날, 트루먼 대통령이 본국으로부터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으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양손에 원자폭탄을 거머쥔 트루먼은 전후 국제 질서를 고려할 때, 소련의 참전을 저지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고, ‘천황제’ 유지 같은 관대한 조건을 달지 않고도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결국 일본에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하고, “다른 대안은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뿐임을 경고하는 내용의 포츠담 선언이 반포되었다.
3월 도쿄 대공습 이후, 수십만 민간인이 B-29의 폭격으로 목숨과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일왕과 대본영의 관심은 오직 ‘국체(國體) 수호’뿐이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국체만 수호하면 ‘1억 신민’이 와신상담해 ‘신국(神國)’ 일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한 국체란 ‘천황제’였고 일왕 히로히토였다.
포츠담 회담 직전 이세신궁(伊勢神宮)이 폭격을 받게 되자 일왕 권위의 상징인 ‘삼종신기(三種神器)’의 수호가 새로운 현안으로 떠올랐다. 삼종신기란 이세신궁에 보관된 ‘야타노카가미(八咫鏡·야타의 거울)’, 아쓰타신궁에 보관된 ‘구사나기노쓰루기(草薙劍·구사나기의 검)’, 행방을 알 수 없는 ‘야사카니노마가타마(八尺瓊勾玉·야사카니의 굽은 구슬)’를 뜻한다. 삼종신기는 일왕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신화적 기물로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다.패전을 코앞에 두고도 일왕과 대본영에게는 1억 일본인의 목숨보다 고대의 거울, 검, 구슬 따위를 지키는 것이 더 절박했다.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놓고 계전파(繼戰派)와 화평파의 의견이 갈렸다. 무조건 항복하게 되면 계전파는 국체 수호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본 반면, 화평파는 추후 협상에 따라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 차이의 전부였다. 포츠담 선언 이튿날, 스즈키 간타로 총리대신은 소련이 중재 여부를 결정할 시간을 벌기 위해 언론에 ‘모크사쓰(默殺·묵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훗날 스즈키는 아들에게 영어의 ‘노코멘트’라는 의미였다고 했지만, 당시 미국은 항복 요구를 모욕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왕과 대본영이 국체 수호와 삼종신기 보전을 위해 머뭇거리던 사이,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투하되었다. 사흘 후인 9일 0시,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150만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눠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을 향해 일제히 진격했고, 오전 11시 2분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이 투하되었다.
8월 9일 깊은 밤, 궁중 방공호 안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3대3으로 계전파와 화평파의 의견이 팽팽히 갈린 가운데, 일왕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성단(聖斷)’을 내렸다. 훗날 히로히토 일왕은 수락의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 민족이 멸망해 버리기 때문에 적자(赤子·백성)를 보호할 수 없다. 둘째, 적이 이세만 부근에 상륙하면 이세와 아쓰타 두 신궁이 적의 제압 아래로 들어가 신기를 이동시켜 그것의 안전을 확보할 방안이 없다. 국체 수호가 어렵다.”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왕은 한반도와 대만, 그리고 전쟁 중에 확보한 모든 점령지를 잃었지만, ‘천황제’와 1억 일본인보다 소중한 고대의 거울, 검, 구슬만은 지켜냈다. 닷새 후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참고문헌>
고모리 요이치,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뿌리와이파리, 200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50′, 탐구당, 2003
이치바 준코, ‘한국의 히로시마’, 역사비평사, 2003
존 톨런드, ‘일본제국 패망사’, 글항아리, 2019
천문야자, ‘히로시마여 히로시마여!’, 새가정, 1987.7
하세가와 쓰요시, ‘종전의 설계자들’, 메디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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