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만 잘 그려도 大家”… 새벽마다 새 장미를 화병에 꽂았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2023. 4. 2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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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허름한 일상이 지고한 예술로
화가 원계홍 탄생 100주년
화가 원계홍이 1977년 완성한 유화 ‘장미’. /원계홍기념사업회

1970년대 가수 박인희가 불러서 히트를 쳤던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박인환이 시를 쓰고 이진섭이 곡을 붙였다. 1956년,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예술가가 명동에 모여 하루하루를 지탱하던 시절 ‘경상도집’이라는 주점에서 즉석 주조된 노래였다.

박인환과 이진섭은 모두 1920년대에 태어난 이들로, 전후(戰後) 명동을 배회하던 대표적인 “명동백작”들이었다.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없는 가난한 예술가였지만, 멋들어진 품새에 누구보다 고아한 정신세계를 갖춘 이들은 진정한 ‘귀족’들이었다. 이 무리에 어울린 화가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 박인환과 이진섭의 친구였던, 화가 원계홍(1923~1980)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979년 두 번째 개인전 당시의 원계홍. /주명덕

◇1920년대 생의 비애

원계홍도 1920년대생이다. 1923년, 서울 태생이다. 1920년대 출생자들은 어떤 점에서 20세기 한반도에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불행한 청춘을 보낸 세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조선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에 들어갈 시점에 태평양전쟁을 맞는다. 1940년대 초 기껏 일본으로 유학하러 가도, 곧 학도병 이슈가 터진다. 이 문제를 지나간다 해도 1945년 해방 후 혼란 정국 속에서 헤매다 1950년 전쟁통에 휩쓸려 20대를 다 날려보낸다.

1979년작 유화 ‘수색역’. /원계홍기념사업회

한창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할 20대 나이에, 이들은 두 번의 전쟁을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체로 ‘독학파’였고, 전쟁의 비애를 체험하면서 정신적 무기력과 허무주의를 바탕에 깔고 살았다. 1910년대에 태어났다면 제대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각 분야에서 ‘조선 최초’ 타이틀이라도 따는 것이 가능했다. 1930년대에 태어났더라면 전후(戰後) 재편되는 사회 구조의 주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1920년대생은 ‘낀 세대’로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각개전투로 살아남아야 했다.

‘세월이 가면’을 작곡했으나 작곡가는 아니었고, 지휘자를 꿈꿨으나 이루지 못했으며, 극작가, 번역가, 영화 제작자 등등이었던 이진섭은 종종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시대는 턱걸이 제너레이션이야. 무언가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성공하지 않는 삶

원계홍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서울 영등포에서 철공장을 하는 꽤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 시절 유치원을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배재고보 졸업 후 1942년 일본 유학을 떠나 명문사립 주오(中央)대학에 들어갔지만, 폐결핵에다 학도병 문제로 인해 1944년 귀국해야 했다.

도쿄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 공부를 위해 사설 아카데미에 다녔다. 마티스의 제자였던 일본인 화가 이노쿠마 겐이치로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채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그의 지도를 받은 것이 원계홍이 받은 미술교육의 전부였다.

연도 미상의 유화 '지붕'. /원계홍기념사업회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인력거 한가득 미술책을 싣고 왔다는 그는, 이후 그저 혼자 공부하고 그림을 그렸다. 철저한 독학파였다. 해방 후 1948년 이대 영문과 출신 엘리트 여성 민현식과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지만, 그는 평생 별다른 직업이 없었다. 6·25전쟁이 터져서 대구에서 피란 생활을 했고, 폐허의 서울에 돌아와서는 여느 예술가들처럼 명동을 배회했다. 시인 박인환, 극작가 이진섭과 어울려 지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원계홍이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친이 하는 철공장 일을 돕기도 했고, 경기도 부천에 있던 과수원을 돌보는 일도 좀 했다. 1960년대 말에는 인쇄소를 잠깐 운영해 보기도 했다. 대체로 모든 사업을 흐지부지 접기는 했지만 말이다. 흔한 학교 선생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제대로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탓도 있었으리라. 표면상 그의 인생은 제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

1979년작 유화 '용산우체국'. /원계홍기념사업회

그러나 원계홍 자신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는 성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보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는 홀로 철저하게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더구나 예술가라면 성공을 추구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성공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존재이다.

“예술가의 세계란 쟁투와 질투, 야망과 절망, 책모(策謀)와 불성실이 소용돌이치는 절망적인 곳이며, 거기서 살아남는 자는 선인(善人)만에 한한다고 할 수는 없다. 끈질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겸허하고 탈속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대의 위험은 성공이라는 것이다.” 원계홍이 쓴 작가노트의 일부이다. 성공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탈속을 지향할 수 있는 그의 정신세계가 놀랍기만 하다.

◇무림의 고수

‘적극적으로 성공하지 않는 삶’을 추구하면서, 화가는 혼자 무엇을 했나? 그는 동서고금의 미술사와 미학을 섭렵했다. 그는 스스로 평론에서는 자신이 “일류”라고 자부할 만큼 아는 것이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유명한 평론가 이경성의 회고에 따르면, 1950년대 서울 낙원동에 예술가들이 모여 ‘화론(畵論)’을 나누고 겨루던 시절, 원계홍이 가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78년작 유화 '정물'. /원계홍기념사업회

“그는 가끔 들러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탁견을 피력하고 어디로 사라지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별로 오랫동안 같이 있지 않고도 그의 존재를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원계홍은 ‘무림의 고수’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폴 세잔에 심취했다.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순간을 포착하며 “감각만의 미학”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세잔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회화의 질서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구와 원통, 원뿔로 이루어져 있다”는 세잔의 유명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세잔이 사과만 열심히 그려서 회화의 원리를 터득한 것처럼, 원계홍은 “장미만 잘 그려도 대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는 새벽마다 새 장미를 사 와서 화병에 꽂은 후, 테이블에 놓인 장미를 여러 다른 각도에서 계속해서 그렸다. 시점에 따라 테이블 형태와 패턴이 어떻게 변하는지, 빨간 장미와 노란 레몬은 어떤 배치에서 딱 맞게 조화로운지 화가는 끊임없이 연구했다.

◇“회화는 그 자체가 주제”

그는 또한 인적이 드문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 동네 언저리의 좁은 골목과 집들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아무렇게나 지어진 평범한 집들의 무질서한 배치를 끈질기게 관찰하다 보면, 화가는 그 속에서도 존재하는 ‘형태의 질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새벽의 태양 빛에 따스하게 감싸인 도시의 뒷골목을 바라보면서, 원계홍은 “동일한 색가(色價)를 갖는 색들의 우미한 대비”를 잡아낼 수 있었다. 화가는 이런 일에 사로잡혀 시간 가는 줄 몰랐을 것이다.

1977년작 유화 '성북동 풍경'. /원계홍기념사업회

원계홍의 작품이 놀라운 지점은, 작품의 대상을 1970년대 당시 한국의 허름한 일상에서 그대로 끌어왔다는 사실이다. 집장수들이 아무렇게나 지은 집, 양동의 사창가, 성북동의 가난한 좁은 골목 등 어디 하나 내세울 것 없다고 우리 스스로 생각했던 하찮은 풍경에다 화가는 엄숙하고 보편적인 회화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다.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못살던 시절, 도시 뒷골목은 분명 서글프도록 무미건조한데, 그것을 그린 풍경화는 어쩐지 숭고할 정도로 아름답다. 이런 기묘한 조합은 매우 신선할 뿐 아니라 거의 경이롭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김환기 같은 선배 화가가 미(美)의 원형을 조선백자의 미학 같은 데에서 취해왔다면, 원계홍은 전통을 들먹이지 않고도, 현재의 평범한 일상에서 미학적 완결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회화는 그 자체가 주제”이기 때문에, 그 소재가 장미이든 뒷골목이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회화의 본질”,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지고(至高)의 아름다움을 회화적으로 구현하는 일이었다.

◇이제야 빛을 본 작품

사람들은 전쟁터 같은 어둡고 참담한 시절에 어떻게 예술가로 생을 영위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원계홍과 같은 예술가는, 시대가 어둡고 힘들었기 때문에, ‘예술’에라도 매달려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유일한 구원이었다.

하지만 “회화의 본질”을 구현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 도도하고 지독한 완벽주의자는 그것을 해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까? 원계홍은 1978년, 55세가 되어서야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공간화랑에서 열린 이 전시는 미술계의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화가는 “막상 걸어놓고 보니, 건질 만한 작품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1978년작 유화 '소녀'. /원계홍기념사업회

이후 불과 2년이 지난 1980년, 원계홍은 딸들이 사는 미국에 가서 생활을 이어가려 했다가, 미국에 도착한 지 20일 만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향년 57세였다. 이 무렵 한국화단은 1930년대생 화가들의 주도하에, 세계와 동시대적으로 발맞춘 ‘추상’의 물결로 뒤덮였고, 원계홍의 이름은 오랫동안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열리고 있는 원계홍 탄생 100주년 전시는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1980년대에 유족이 보관하던 원계홍의 작품을 보고, 첫눈에 반한 두 소장가가 있었다. 이들은 40여 년간 작품을 오롯이 보관해오다가 지금 서울 성곡미술관에 100여 점의 작품을 꺼내놓았다. 가장 놀라운 반전은 이 전시가 MZ세대의 소문을 타고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탄소년단 RM을 필두로 젊은 관객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고 한다.

100년 전에 태어나 전쟁과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원계홍의 정신세계를 우리 세대가 이해하기는 도무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화가의 말대로 “회화의 본질”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통하는 것일까? 원계홍은 바로 그 사실을 이제라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오로지 한 길, 그림 그리는 일에 바쳐 이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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