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성적표를 받아들고
사람을 기르는 일이 어렵다는 하소연을 들어주던 친구가 의아하단 목소리로 “너의 아들이 막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는 아니지 않냐”고 물었다. 친구의 말이 맞다.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어긋난 짓을 일삼는 아이는 아니다. 오히려 스위트하고 유쾌한 아이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육아가 힘들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소진된다고 느낀다.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게 힘들까 생각해보면 육아란 끊임없이 답이 명확하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하는 과정이고, 최선을 다한다 해도 그 끝이 내 뜻대로 되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약속한 갯수의 사탕을 다 먹었는데도 하나 더 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면서 약속의 중요성을 설명할 것인지, 건강에 해가 될 정도의 양이 아니라면 너그러운 엄마의 사랑과 융통성을 보여줄 것인지…. 이런 결정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해야만 한다. 어린아이와 사탕 갯수를 가지고 싸우는 과정은 귀여운 고민일지도 모른다.
중기 청소년이 된 내 아이와의 갈등, 아니 이 아이를 기르면서 마주하는 내 안의 갈등은 훨씬 더 괴롭고 복잡하다.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등수와 백분위가 쓰여 있는 성적표를 집에 가져왔다. 물론 이만큼 길렀으니 이제 내 아이가 영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숫자가 쓰여 있는 성적표를 가져올지는 몰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시름이 깊어진다.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척척 푸는 초등학생들이 넘쳐나고, 명확하게 설정한 자신의 꿈과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청소년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내 집에는 없다. 여기서 나는 또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어차피 내가 공부를 대신해줄 수 없는 이상, 자신이 만든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선택의 순간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연습을 장려할 것인지 무엇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고 있는 청소년을 공부하라고 떠밀면서 불행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가 싶다가도, 혹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과거의 어느 시점을 후회하거나 스스로를 실패했다고 여길까봐 몹시 불안하기도 하다. 스스로가 가진 지식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을 때의 희열과 같은 소리는 아이에게 먹히지 않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 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인 지역격차나 학력차별과 같은 이야기는 아이에게 들이밀고 싶지 않은 것이 내가 가진 깊은 딜레마다.
어떻게 달콤한 말로 아이를 꼬셔볼 것인지, 유혹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아이를 유인해 책상 앞에 앉힐 것인지 답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아이를 꼬시는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성적표의 숫자가 네 인생의 행복지수라고 협박을 한다 해도 성공할까 말까인데, 그 협박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는 내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결국 나는 지금 행복한 너의 모습을 응원한다고, 혹시라도 나중에 후회가 된다면 조금 늦었더라도 선택을 돌이킬 수 있는 용기가 있으면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라도 다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또 성적표를 받아들고 한가득 걱정을 밤새 쌓을지 모른다. 높은 점수가 가져다줄 행복 말고 또 다른 행복이 아이에게 있을 거라고,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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