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어머니의 말에 주저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빛이 향한 그곳엔 동물 내장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어린아이의 코를 찔렀지요. “다 너를 위해서야.” 그녀의 눈빛은 단호해 보였습니다. 낯빛이 파랗게 질린 아들의 왼팔을 들고 강제로 큰 통에 담급니다.
“싫어요, 어머니, 제발 놔주세요.” 어머니는 쉬이 끝낼 기세가 아니었습니다. 다섯살 소년의 팔은 피 칠갑이 되어갔지요. 그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어머니는 그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안정을 취하는 그를 어머니가 또 다른 방에 데려갑니다. ‘지지직’ 소리가 들려옵니다. 전기 충격기였습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들이 아이의 왼쪽 목에 충격기를 갖다 댑니다. “어머니, 어머니, 제발 살려주세요.”
녹초가 된 아이는 맹세합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저 여자의 모든 걸 부숴 버리겠어.” 소년은 꿈을 이룰 채비를 갖춥니다.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2세가 됐기 때문입니다. 세계 1차대전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간주되는 인물이지요. 독일을 군국주의로 물들인 그의 과거에는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오늘은 빌헬름과 그의 어머니 비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자유주의 왕족 커플의 ‘아픈 손가락’
빌헬름2세가 태어나기 전 19세기 중반 유럽으로 가봅니다. 어머니 비키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첫째 딸이었습니다. (둘의 이름이 빅토리아 동명이라 애칭인 비키로 표기합니다.) 아버지 앨버트를 닮아 지적 호기심이 많고 총명했지요. 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탓에 의회주의가 자리 잡은 영국의 정치체제를 신봉했습니다.
그녀의 짝은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왕세자 프리드리히였습니다. 프로이센은 잦은 전쟁에 점점 군국주의 국가가 되어갔지만, 왕세자만큼은 이런 기류를 무척이나 맘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둘은 제법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지요.
“우리...우리 아이는 어떤가요?”
결혼 1년만에 첫 아이가 찾아옵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5시간에 걸친 난산에 아이의 건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술 과정에서 의사는 비키의 산도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걸 깨닫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습니다. 아이의 왼쪽 팔을 잡아 당겨 강제로 빼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지요.
1859년 1월 27일, 난산의 후유증은 깊었습니다. 점점 성장하는 아들의 왼쪽 팔은 오른쪽보다 15cm나 짧았지요. 누구봐도 심각한 장애였습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 그랬겠지만, 특히나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불행한 팔만 없다면”…정체불명 치료에 집착한 비키
비키에게 아들의 장애는 불명예였습니다. 어머니였던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그 불행한 팔만 없다면 나는 그가 자랑스러울 거예요.” 그녀는 자유주의자였지만, 아들에겐 관용이 없던 사람이었지요.
괴상한 치료법이 동원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어린 아이의 팔을 죽은 토끼의 내장으로 가득한 통에 담그거나, 목에 전기 충격을 가한다거나.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명백한 학대였습니다.
비키는 아들을 강압적으로 키웠습니다. 왕이 될 사람은 말을 잘 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스파르타식 승마 교육도 이어집니다. 팔이 불편한 빌헬름은 수도 없이 떨어졌지만 억지로 다시 말에 올라 타야 했습니다. 빌헬름은 점점 부모를 증오하기 시작했지요. 모자 사이는 멀어졌고 그는 삐뚤어져 갔습니다.
“영국 의사가 내 팔을 불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내 어머니의 잘못이다. 나에게 가해진 모든 고통 역시 어머니 때문이다.”
비뚤어지는 빌헬름2세…군국주의 할아버지를 모델로 삼다
빌헬름2세는 어머니의 모든 것을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들의 자유주의 사상을 그는 혐오하지요. 겉으로는 자유·평등을 외치면서 자신에게 가했던 위선적인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대인에 대해서도 그는 “인류가 어떤 식으로든 제거해야 하는 성가신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그의 부모가 유대인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직후였습니다.
그는 새 본보기를 찾았습니다. 바로 할아버지이자, 현 황제였던 빌헬름1세였습니다. 황제 빌헬름1세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한 인물입니다. 남성주의적이고 군국주의를 강조했지요. 자유주의 성향이었던 아들 프리드리히와 며느리 비키와 각을 세운 것도 여러 번. 빌헬름2세는 할아버지에게서 자신의 길을 발견합니다.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의 사람이 되어 갔던 것이지요.
21세가 됐을 무렵입니다. 포츠담에 있는 보병 제1연대 중위로 배치된 뒤에 그는 더욱 군사주의적인 인물로 거듭나죠. 당시 편지에선 그의 만족감이 여실히 묻어납니다. “저는 여기서 제 진정한 친구, 관심사, 그리고 ‘가족’을 찾았습니다.” 사랑,우정,연대. 가정에서 충족하지 못한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군대’가 제공한 셈이었지요. 그가 점점 군대를 사랑하게 된 배경입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비키가 아이의 질병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거리를 뒀고, 이게 빌헬름2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한 가정의 비극이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로 연결되는 아이러니가 여기 있었습니다.
독일제국의 최고 권력이 된 빌헬름2세
1888년 3월, 황제 빌헬름1세가 사망합니다. 독일에서 새로운 기대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엄습하지요. 아들 프리드리히가 새 황제가 되면서입니다. 그의 자유주의 성향은 진보주의자에겐 기대감을 줬고, 보수주의자에겐 불안감을 안겼지요.
그러나 운명은 참으로 얄궂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즉위 99일만에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독일은 빌헬름2세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군국주의 열풍이 더 거세진다는 의미였지요. 1888년이 ‘세 황제의 해’로 불립니다.
‘빌헬름2세는 자신만의 독일을 만들어 갑니다.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 역시 그에겐 눈엣가시였지요. 마침 재상이 추진하는 ‘반사회주의’ 법안에 몽니를 부려 사실상 사임을 받아냅니다. 빌헬름2세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비키는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부모와 가까운 모든 기관과 사람들은 숙청 당합니다. 역사학자들은 빌헬름2세의 즉위로 독일제국은 안정적인 정부와 국제 평화를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기회를 파괴했다고 진단합니다.
어머니를 향한 증오…영국과의 군비경쟁으로
조국의 군국주의 흐름을 가속화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고향 영국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였지요. 독일은 유럽의 강국이었지만, 세계적 제국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위상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떨어졌지요. 빌헬름2세는 ‘해군’이 영국을 넘어설 핵심 열쇠로 봤습니다. 1897년 독일 해군이 창설된 배경이었습니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군대가 가장 큰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지요.
빌헬름2세는 “독일은 군주제와 기독교의 땅이지만, 영국은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땅”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는 영국이 독일과 동맹을 맺어주길 간절히 원할 정도로 또한 그들의 인정을 갈망하기도 했었지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가 보이는 행동 그대로였습니다. 영국 왕이자 자신의 삼촌이었던 에드워드7세와의 관계가 악화일로였지요.
그토록 증오하던 어머니 비키가 1901년 8월 5일 유방암으로 사망합니다. 빌헬름2세는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영국과 독일의 연결고리도 끊어진 것과 다름 없었지요.
1차 세계대전의 총성…독일의 무모한 선택
그리고 그 날이 찾아옵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자가 세르비아 청년에 암살 당한 날이었습니다. 빌헬름2세는 유럽의 혼란에서 기회를 봅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에게 ‘백지수표’를 내밉니다. ‘오스트리아가 무슨 행위(특히 전쟁)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를 지지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날렸지요.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군인 전사자 900만명, 민간인 사망자 500만명, 고아만 800만명이었습니다. 한 가정의 모자 갈등이 수백만의 부모가 참척(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사망하는 일)을 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하면 지나친 일반화 일까요. 역사학자 프리츠 피셔는 “독일이 오랫동안 유럽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기를 원했고, 뜻밖에 기회를 포착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분석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사진은 판화가 쾨테 콜비츠의 작품입니다. 어머니로부터 보이지 않는 손이 아이를 빼앗아 가는 그림이지요. 어머니들은 뭉쳐 아이들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국가의 폭력은 아들을 잃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쾨테 콜비츠는 1차 세계대전으로 큰아들 한스와 작은아들 페터를 잃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말합니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요. 이 땅의 어머니들은 더 이상 위정자들의 갈등으로 아이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한다고요. 그러나 인류는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더 큰 괴물을 소환하지요. 히틀러였습니다.
1차 대전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신흥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민족국가들의 염원, 경제 위기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분명 존재합니다. 아들 빌헬름2세와 어머니 비키의 갈등이 전쟁을 일으킨 절대적인 이유였다면 그건 분명 단견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상상합니다. 만약, 비키가 어린 빌헬름2세에게 항상 미소를 지어줬다면. 장애를 가진 팔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줬다면. 엄마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며 따스하게 안아줬다면요. 빌헬름2세의 독일제국은 군국주의의 늪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요.
5월은 가정의달입니다. 장난감을 사주는 것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아이와 살갗을 맞대고 환히 웃어주세요. 결국 우리 어른의 몫입니다. 아이들이 사회의 시민으로 훌륭히 살아가는 것도, 증오에 빠져서 괴물로 자라는 것도.
<네줄요약>
ㅇ독일제국 빌헬름2세는 영국의 공주 비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난산 끝에 왼팔에 심각한 장애를 입었다.
ㅇ비키는 아들을 모질게 훈육해 장애를 고치고자 했다. 빌헬름2세는 부모에 대한 증오를 키워나갔다.
ㅇ빌헬름2세가 즉위한 뒤 독일은 영국과의 군비경쟁에 돌입했다. 어머니의 나라에 대한 증오와 인정 욕구가 뒤섞인 결과였다. 세계1차대전의 한 원인이었다.
ㅇ아이를 사랑하자. 그들을 꽃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키우는 것도 어른들이다.
<참고문헌>
ㅇ제바스티안 하프너,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돌베개, 2016년
ㅇ브랜든 심스, 영국의 유럽, 애플미디어, 2013
ㅇ닐 맥그리거, 독일사 산책, 옥당, 2016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