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농장이야 미술관이야? 아름다운 토스카나의 와이너리들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4. 29.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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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이야기지만, 좋은 와인은 훌륭한 예술 작품과 같은 감흥을 줍니다. 예컨대 흔히들 묵직한 보르도 좌안의 1등급 레드와인을 마실 때면 장엄한 베토벤의 교향곡이, 밝고 경쾌한 부르고뉴 그랑크뤼 피노누아를 마실 때면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떠오른다고 하죠. 와인을 소재로한 유명한 만화인 ‘신의물방울’에서 주인공이 와인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의 오감이 언어로 완벽하게 형언하기 힘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각에 상당 부분 의지해야 하는 고차원의 표현물을 예술(art)이라고 정의하는데요. 어쩌면 시각과 후각, 미각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와인도 예술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또 다른 예술 작품에 의해 비교·표현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양조자들은 자신의 상품에 예술을 덧씌우기도 합니다. 바로 레이블인데요. 산업화 이전까지 단순히 ‘우리가 생산했다’라는 일종의 증표이었던 레이블에 최근에는 예술 작품을 그려넣는 등 다양한 시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비 그라츠(Bibi Graetz)의 테스타마타(Testamatta) 역시 그런 케이스죠.

여기에 한술 더 떠, 아예 와이너리에 예술을 접목하기도 합니다. 최근 다녀온 이탈리아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지역의 와이너리들에도 유독 예술 작품들이 눈에 띄는 곳들이 있었는데요.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외관과는 대비되는 반전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오늘은 와인과 예술이라는 두 단어 사이의 ‘연결감’을 느낄 수 있었던 와이너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드론으로 촬영한 토스카나의 한 와이너리 전경.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꼬막 껍데기의 골처럼 이어진 포도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사진 = 전형민 기자]
미술관인가 와이너리인가… 카스텔로 디 아마
지난 13일(현지시각) 키안티 클라시코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중 하나인 카스텔로 디 아마(Castello di Ama)를 방문 했습니다. 오너이자 와인메이커인 마르코 팔란티(Marco Pallanti)는 유리로 사방의 벽을 세운 유리의 집(Glass house) 접객실에서 첫 인사를 하자마자 대뜸 “와인 메이커(Wine maker)는 예술가(Artist)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왠 뚱딴지 같은 소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의 소개로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나선 이해가 되더라고요. 와이너리 곳곳에서 현대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팔란티와 그의 아내 로렌자 세바스티(Lorenza Sebasti)는 20년째 와이너리에서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두 사람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름다운 풍광을 갖춘 와이너리에 예술을 더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카스텔로 디 아마의 숙성고에 위치한 첸젠 작가의 작품. 와인잔과 같은 유리를 직접 가공해 천장에 이어붙였다. 조명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사진 제공 = 와인21]
가장 처음 안내한 작품은 실제로 와인이 숙성 중인 셀러 천장에 달린 중국 작가 첸젠(ChenZhen)의 유리공예였습니다. 작품은 조명과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빛의 굴절을 보여줬습니다. 마르코 팔란티는 작품을 온전히 느끼도록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기다려 줬습니다. 작품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관객이 있는 그대로 작품을 받아들이도록 배려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거장, 다니엘 뷔렌(Daniel Buren)이 야외정원에 거울을 활용해 설치한 작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길게 이어진 거울 벽의 중간을 뚫어놨는데, 너머로 계절마다 무수한 변화를 보이는 포도밭을 그대로 노출시켰죠. 이외에도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 등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만으로도 감탄할 만한 세계적 작가들이 이 와이너리에 작품을 남겼습니다.

다니엘 뷔렌의 야외 설치 작품. 거울 벽의 중간마다 구멍이 뚫려있다. 이를 통해 외부의 포도밭이 보인다. 계절마다 또는 날씨마다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사진 제공 = 와인21]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도 있습니다. 와인 애호가로도 잘 알려진 이우환 화백은 와이너리의 지하 셀러를 보자마자 그곳에 작품을 남기기로 결정했고, 레드와 오렌지빛이 감도는 와인 컬러를 사용해 셀러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매년 와이너리의 가든과 셀러, 채플 등 작가들이 선택한 장소 곳곳에 설치된 작품은 20여점에 이릅니다. 마르코는 “우리는 작가들에게 공간을 보여주고 내줄 뿐, 무언가를 요청하지 않는다”며 “방식은 작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은 직접 와이너리에 방문해 한동안 머무르며 풍광을 감상하고 와인을 마시며 구체적으로 어디에 작품을 설치할지 결정한다. 이것은 ‘와인이 생산되는 장소’에 관한 예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우환 화백의 작품. 이 화백은 카스텔로 디 아마의 사용하지 않는 지하 셀러를 보자마자 여기에 작품을 남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사진 = 전형민 기자]
구름을 재려는 어리석은 자여… 콜레 베레토
같은 날 오후엔 한국에 수입되지 않는 콜레 베레토(Colle Bereto) 와이너리에서 벨기에의 거장 얀 파브르(Jan Fabre)의 작품, 구름을 재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 위에서 커다란 뭉게구름을 향해 팔 벌린 채 자를 들고 서 있는 남자의 동상인데요.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인간을 비꼬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와이너리 매니저인 베르나르도 비앙키(Bernardo Bianchi)는 “2015년엔 좋은 포도가 많이 수확돼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다”면서 “모두 하늘이 한 것이지, 우리가 한 건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고, 도도한 자연의 흐름 앞에서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농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죠.

와인과 예술의 만남은 매년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집니다. 와인 수입사인 와이넬(Winell)은 2014년부터 매년 이어오는 ‘와인과 예술’이라는 주제의 아트인더글라스(Art in the Glass)를 열고 있습니다. 와이넬이 수입하는 와이너리와 작가의 협업(collaboration)을 통해 탄생한 독창적인 작품을 소개하고, 직접 수입하는 와인 150여종을 시음해볼 수 있는 그랜드 테이스팅(grand tasting)인데요. 와인 수입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문화 예술에 기여하겠다는 의도가 돋보입니다.

콜레 베레토 와이너리에서 만난 구름을 재는 남자.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인간을 비꼬고, 자연 앞에 겸손하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사진 = 전형민 기자]
묘하게 닮은 와인과 예술
와인과 예술은 닮았습니다. 양조(wine making)는 떼루아(terroir)라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 속에서 포도나무 생장과 과실 수확이라는 밑그림을 그려내고, 철학이 담긴 양조를 통해 양조자 만의 색깔을 입히는 작업인 셈입니다. 음악으로 치면 작곡 과정에서 멜로디를 정하고, 가장 적절한(혹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화음을 찾아 붙이는 식이라고 해야할까요.

심지어 양조자들은 자신을 아티스트에 비유하거나, 아예 불러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와인 메이커는 예술가 같은 사람’이라던 마르코 팔란티는 물론, 폰토디(Fontodi) 와이너리의 오너이나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협회장인 조반니 마네티(Giovanni Manetti)도 “양조자는 예술가”라며 자부심을 보이기도 했죠.

생산 과정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느끼고 향유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점차 적립해나가고 있지만, 과학기술이 이토록 발전한 현재에도 여전히 와인과 예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도량화하거나 말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요원하죠. 그리고 그 어려운 오묘함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드론으로 촬영한 카스텔로 디 가비아노 포도밭 모습. [사진 = 전형민 기자]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점수를 매기거나 따지려 들기보다 와인을 즐겨달라는 겁니다. ‘이 와인에서는 꼭 이런 맛과 향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면 이 와인은 이런 양조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와 같은 얘기는 와인을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나 의미가 있는 말이죠. 와인러버가 꼭 전문가여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정보는 매주 와인프릭에서 드리겠습니다. 이번 주도 와인과 함께하는 행복한 순간을 누리길 기원합니다. 예술은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고,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누군가에게서 동의를 구해야할 문제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더 존중받고 모두에게 울림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와인프릭에 소개된 와이너리들은 웹사이트를 통해 제한된 숫자의 투숙 예약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휴가를 멋진 예술 작품들과 함께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와이너리에서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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