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락한 도시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한희원 “감옥 같은 생활 속에서 대작이 탄생했다”

김예진 2023. 4. 29.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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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대한 소파와 마주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검은 의자지만 커다란 화면 위에 그려지니 의자가 숨겨놨던 표정이 읽힌다. 때로는 고독이, 때로는 쉼이 됐을 의자에 사람의 시간이 진하게 입혀졌다. 한희원 작가의 작품 ‘검은 의자’다.
‘검은 의자’. 작가 제공
광주를 중심으로 화가이자 양림동골목비엔날레를 이끌어온 문화기획자로 활발히 활동하며 50년여년 미술 인생을 이어온 한희원(68) 작가의 서울 개인전이 한창이다. 서울 서초구 효령로에 위치한 한전아트센터에서 개인전 ‘사유의 침잠, 한희원 대작’전을 열고 있다. ‘대지, 별, 바람, 그리고 생의 시간(Land, Star, Wind, and Time of Life)‘을 주제로 약 50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그가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1년간 홀로 살며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최근 수년간 몰두한 대형 작품을 위주로 선보이는 자리다. 화가가 낯선 도시로 향했던 이유는 뭘까.

“7, 8년 전쯤 가까운 수녀님께서 세계 최초로 기독교 국가가 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로 성지순례 가시는 길에 함께했어요.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하루를 보냈는데, 예기치 못하게 너무나 퇴락한 아름다움을 만났죠. 못사는 나라지만 옛날 그대로 손 안 대고 그대로 놓여진 곳들에서 예술적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나중에 여기 한번 꼭 와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너무나 많은 일에 지치고 시달리며 살던 와중에 트빌리시를 떠올리고 2019년에 홀로 그곳으로 떠났죠.”
‘별의 흔적’. 작가 제공
‘소파’. 작가 제공
‘트빌리시의 생‘. 작가 제공
해방이 고팠던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 스스로를 가뒀다. 감옥생활, 독방생활하듯 1년을 보내며 오직 혼자 걷고, 혼자 그림그리고, 혼자 시를 쓰기만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불과 1년새 그린 그림이 약 360점, 쓴 시가 70점이나 됐다. 작품에는 이국생활 영향이 깊이 스몄다. 유화작품 ‘트빌리시의 생’은 그런 날들 중 하루가 그려졌다.

빈국 도시엔 제대로된 화방도 없었지만, 매일 그림을 그리면서 이틀에 한 번씩 물감을 사러 그 화방에 나갔다고 한다. “화방이라곤 우리 문구점 정도 되는 곳이 두곳 있었어요. 화방가는 길엔 지하 터널이 있었고요. 터널 안이나 트빌리시 곳곳에는 엄청난 벽화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그린 것인데, 샤갈 작품에 등장하는 집시풍의 도상을 벽화 자리에 가미해 그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확장된 사람의 동공은 언제나 터널 밖을 제대로 보여주진 않지만, 밝은 빛의 목적지가 존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일러주며 사람들을 포기하게 두지 않는다. ‘트빌리시의 생’은 그런 순간을 포착해 퇴락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애에 비유한 것처럼 다가온다.

이번 전시 작품 약 50점 가운데엔 200호, 300호, 500호에 달하는 대작이 20여 점이나 된다. 그는 삶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감정을 그림 속에 담고, 그림이 대작일 때 더 크게 증폭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품 앞에 한동안 머물며 제각기 가슴 속에 품은 감정을 그림을 보며 교감하는 관람객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피안의 시간’. 작가 제공
‘신화가 있는 마을’. 작가 제공
한 작가는 “내년이면 일흔이니, 대작을 치열하게 해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작 속에 숨겨진 수많은 메시지가 더 강하게 남곤 하죠.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그림에 대한 욕망을 더 치열하게 담을 대작에 도전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는 10월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이번 전시를 마치는대로 1000호 작업을 하는 것을 목표로 몰입하겠다고 한다. ”모두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슴에 담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슬픔이건, 위로건, 사랑이건, 자기가 가슴 속에 품은 가장 큰것을 작품에서 느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교류하길 바랍니다.“

전시는 5월 4일까지 이어진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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