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사회의 조감도… 과학, 시대에 응답하다
고립·은거 아닌 시대 요구 반영한 결과
X선·방사능도 기업·국가에 호응한 성과
‘응용세계’ 과학 뒤에는 ‘실행세계’ 인간사
나치·스탈린 체제 과학기술 왜곡 눈길
한국전쟁 때 변한 미국과학 모습도 다뤄
20세기, 그 너머의 과학사/존 에이거/김명진·김동광 옮김/뿌리와이파리/4만2000원
특수 상대성이론이 성립되기 위해선 자연 법칙이 등속으로 움직이는 기준좌표계에서 동일하게 보여야 하고, 특히 한계 속도인 빛의 속도는 어떤 좌표계에서 측정하더라도 일정하다는 두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20세기는 과학사에도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물리학과 유전학은 20세기 초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멘델의 재발견을 거치며 근본적인 혁명을 겪었고, 분자생물학과 지구과학은 20세기 중반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고 판구조론이 정립되면서 현대적 형태를 갖추게 됐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존 에이거 교수는 책에서 과학 발전이 과학자의 호기심이나 의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기업과 시장, 국가와 전쟁 등 현실 세계의 요청이라는 ‘실행세계(Working world)’에 의해 추동돼 왔다며, 새로운 물리학의 태동부터 민간의 부에 의존한 미국의 과학, 나치 독일의 과학, 양차 세계대전 및 냉전 속의 과학 등 방대한 20세기 과학사를 조망한다.
저자가 과학 발전의 추동력으로 지목한 실행세계는 운송과 통신, 전력과 같은 현대 사회의 필수적 요소뿐 아니라 기업과 시장, 행정과 국가, 전쟁과 군사력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과학이라는 ‘응용세계’의 불빛 뒤에는 실행세계라는 인간사의 풍경이 깊숙이 자리했다는 것이다. 실행세계의 요구는 때론 식민지 시대의 착취나, 전쟁 및 냉전 시기의 군사력 경쟁, 국가 권력이나 기업의 횡포를 낳기도 했다.
저자는 20세기 초반 과학의 지형을 조망한 뒤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나치 독일 및 소련 등과 민주주의 진영 간의 대립으로 찢겨진 세계의 과학을 다룬다. 국민과 병사 건강이 관리대상이 되면서 관련 과학이 동원되고, 과학 기기 및 장치들 역시 점점 커져갔다. 전쟁 수행을 위해 과학자들도 위원회 등의 형태로 조직되고 동원된다.
나치 집권 시기의 독일과 스탈린 집권기의 소련의 과학은 국가와 체제라는 실행체계에 의해 과학과 과학자들의 삶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치 집권하에 망명하지 않는 독일 과학자들은 유대인을 철저히 배제하는 ‘아리아 물리학’이라는 독특한 물리학을 가공했고, 스탈린 시기의 소련 과학자들 역시 변증유물론을 기반으로 유전학과 진화론 등 그들만의 독특한 과학을 만들어냈다.
제2차 대전 전후 과학은 더욱 대형화, 조직화됐다. 여러 학문 간 협력으로 레이더 시스템 개발이 시도되면서 레이더학,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 개발을 위한 화학의 발전이 이뤄졌다. 많은 분야의 과학과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했다.
냉전 시기 과학의 발전에 대해선, 저자는 새롭게 기밀 해제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냉전은 우주 연구와 지구물리학, 인터넷을 비롯한 사이버네틱스 등에서 과학 간 연대의 틀을 형성하는 등 ‘거대과학’ 시대를 열었고, 동시대 과학자들의 보안의식을 비롯한 정신 상태와 연구 활동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특히 한국전쟁 역시 미국 과학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모습도 인상적이다. 한국전쟁 기간 트루먼과 맥아더 간 원자폭탄 사용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면서 원자폭탄의 위상 문제가 제기됐고, 미국 내에선 과학을 군사체계 안에서 좀더 전면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피임약을 비롯해 일상의 생의학화와 생명공학의 붐, 과학지식 사유화 경향, 기후위기에 따른 과학 등 새로운 전환 시대의 과학 흐름도 조망한다. 후기 자본주의에 구조화된 실행세계가 어떻게 과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책은 사회적 맥락이 탈락된 ‘내적 접근’에 집중했던 기존 과학사 서술과 크게 다르다. 과학 내적인 논리와 함께 시장과 기업, 전쟁과 행정 등의 실행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과학사의 풍성한 풍경을 보여준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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