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사회의 조감도… 과학, 시대에 응답하다

김용출 2023. 4. 29.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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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양자역학 등
고립·은거 아닌 시대 요구 반영한 결과
X선·방사능도 기업·국가에 호응한 성과
‘응용세계’ 과학 뒤에는 ‘실행세계’ 인간사
나치·스탈린 체제 과학기술 왜곡 눈길
한국전쟁 때 변한 미국과학 모습도 다뤄

20세기, 그 너머의 과학사/존 에이거/김명진·김동광 옮김/뿌리와이파리/4만2000원

1905년, 유명한 물리학 잡지 ‘물리학 연보’에 스물여섯 살 청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작성한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관하여’가 실렸다. 논문은 특수 상대성이론을 담고 있었고, 아울러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을 가리키는 방정식 E=mc2도 주석 형식으로 들어 있었다.
많은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20세기 과학사를 시장과 기업, 정부, 전쟁과의 관계 속에서 조망한 책이 번역 출간됐다. 저자인 존 에이거 교수는 20세기 과학 발전은 ‘실행세계’에 의해 추동돼 왔다고 강조한다. 사진은 20세기 과학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왼쪽부터),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에드윈 허블, 로버트 오펜하이머. 위키피디아 사진
특수 상대성이론의 골자는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라서 빨리 움직일수록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을 안다. 예를 들면, 대기 위 높은 곳에 떠있는 인공위성과 지구 표면 사이에는 다른 시간이 흐르듯.

특수 상대성이론이 성립되기 위해선 자연 법칙이 등속으로 움직이는 기준좌표계에서 동일하게 보여야 하고, 특히 한계 속도인 빛의 속도는 어떤 좌표계에서 측정하더라도 일정하다는 두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은 수도사 같은 고립이나 은거 속에서, 혹은 그의 특허 업무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히 특허에 근접한 전기기술에 대한 면밀한 검토로부터 촉발된 것이었다. 즉, 그는 시간 좌표화 절차와 기술의 확산을 최전선에서 관찰하고 이해하기에 좋은 스위스 베른의 특허국 사무소 보조 심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연구 성취는 바로 산업과 기업, 국가와 제국 경영을 위해 좌표화된 시계라는 시대의 요구를 상세하게 검토하고 반영한 결과였던 셈이다.
존 에이거/김명진·김동광 옮김/뿌리와이파리/4만2000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뿐이 아니었다. 뢴트겐의 X선, 퀴리의 방사능,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 멘델 유전 이론의 재발견 등 1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20세기 초반을 수놓은 물리학과 생명과학, 심리학 등 많은 과학들이 당시 기업과 사회, 국가와 정부의 요구에 호응하면서 발전해 갔다.

20세기는 과학사에도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물리학과 유전학은 20세기 초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멘델의 재발견을 거치며 근본적인 혁명을 겪었고, 분자생물학과 지구과학은 20세기 중반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고 판구조론이 정립되면서 현대적 형태를 갖추게 됐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존 에이거 교수는 책에서 과학 발전이 과학자의 호기심이나 의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기업과 시장, 국가와 전쟁 등 현실 세계의 요청이라는 ‘실행세계(Working world)’에 의해 추동돼 왔다며, 새로운 물리학의 태동부터 민간의 부에 의존한 미국의 과학, 나치 독일의 과학, 양차 세계대전 및 냉전 속의 과학 등 방대한 20세기 과학사를 조망한다.

저자가 과학 발전의 추동력으로 지목한 실행세계는 운송과 통신, 전력과 같은 현대 사회의 필수적 요소뿐 아니라 기업과 시장, 행정과 국가, 전쟁과 군사력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과학이라는 ‘응용세계’의 불빛 뒤에는 실행세계라는 인간사의 풍경이 깊숙이 자리했다는 것이다. 실행세계의 요구는 때론 식민지 시대의 착취나, 전쟁 및 냉전 시기의 군사력 경쟁, 국가 권력이나 기업의 횡포를 낳기도 했다.

저자는 20세기 초반 과학의 지형을 조망한 뒤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나치 독일 및 소련 등과 민주주의 진영 간의 대립으로 찢겨진 세계의 과학을 다룬다. 국민과 병사 건강이 관리대상이 되면서 관련 과학이 동원되고, 과학 기기 및 장치들 역시 점점 커져갔다. 전쟁 수행을 위해 과학자들도 위원회 등의 형태로 조직되고 동원된다.

나치 집권 시기의 독일과 스탈린 집권기의 소련의 과학은 국가와 체제라는 실행체계에 의해 과학과 과학자들의 삶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치 집권하에 망명하지 않는 독일 과학자들은 유대인을 철저히 배제하는 ‘아리아 물리학’이라는 독특한 물리학을 가공했고, 스탈린 시기의 소련 과학자들 역시 변증유물론을 기반으로 유전학과 진화론 등 그들만의 독특한 과학을 만들어냈다.

제2차 대전 전후 과학은 더욱 대형화, 조직화됐다. 여러 학문 간 협력으로 레이더 시스템 개발이 시도되면서 레이더학,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 개발을 위한 화학의 발전이 이뤄졌다. 많은 분야의 과학과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했다.

냉전 시기 과학의 발전에 대해선, 저자는 새롭게 기밀 해제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냉전은 우주 연구와 지구물리학, 인터넷을 비롯한 사이버네틱스 등에서 과학 간 연대의 틀을 형성하는 등 ‘거대과학’ 시대를 열었고, 동시대 과학자들의 보안의식을 비롯한 정신 상태와 연구 활동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특히 한국전쟁 역시 미국 과학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모습도 인상적이다. 한국전쟁 기간 트루먼과 맥아더 간 원자폭탄 사용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면서 원자폭탄의 위상 문제가 제기됐고, 미국 내에선 과학을 군사체계 안에서 좀더 전면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피임약을 비롯해 일상의 생의학화와 생명공학의 붐, 과학지식 사유화 경향, 기후위기에 따른 과학 등 새로운 전환 시대의 과학 흐름도 조망한다. 후기 자본주의에 구조화된 실행세계가 어떻게 과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책은 사회적 맥락이 탈락된 ‘내적 접근’에 집중했던 기존 과학사 서술과 크게 다르다. 과학 내적인 논리와 함께 시장과 기업, 전쟁과 행정 등의 실행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과학사의 풍성한 풍경을 보여준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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