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서민 두 번 울리는 전세 사기
■
「 선순위 근저당 있으면 백약이 무효
사기 입증돼도 처벌은 최고 15년
」
지난 25일 수원지법 안산지원 형사2단독(부장판사 장두봉)은 최모(43)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검찰이 구형한 형량보다 1년을 늘렸다. 최씨 일당은 2020년 4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전세가를 매매가보다 높이 매기는 이른바 ‘깡통주택’ 수법으로 안산 일대에서 임차인 31명의 보증금 70억원을 가로챘다. 최씨는 300채, 공범은 1200채, 900채를 각각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속칭 ‘빌라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실 ‘빌라 사기의 신’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재판부는 “무자본 갭투자를 통해 수익을 올리면서도 피해자들에게 보증금을 반환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반면 지난해 12월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5단독(남인수 부장판사)은 40대 부동산 임대회사 대표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그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근저당이 설정된 빌라 150여채를 매입한 뒤 세입자 126명으로부터 전세보증금 123억원을 받아 가로챘다. 이들은 근저당 규모를 축소하거나 “보증금으로 은행 빚을 갚아 근저당을 풀겠다”고 피해자들을 속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는 처음부터 보증금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고 보고 법정최고형(사기죄 10년, 2건 이상일 경우 50% 가중해 15년)을 선고한 것이다.
남씨는 후자에 가깝다. 시세 2억원인 빌라를 담보로 금융권에서 1억5000만원의 대출을 받았다. 이후 공인중개사 등과 짜고 시세를 2억5000만원이라고 속인 뒤 보증금 1억원에 전세를 놨다. 최근 금리 급등으로 대출을 갚기 어려워지자 빌라는 경매에 넘어갔다. 낙찰가는 시세의 50~60% 수준. 임차인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날 위기다. 아예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고 같은 건물을 놓고 은행과 임차인에게 이중으로 돈을 받아 챙긴 것이다.
법원 판결을 보면 피해자 입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선순위 근저당이다. 피해 구제를 위해 정부는 경매 유예와 임차인의 우선매수청구권 등의 대책을 내놨다. 야당에서는 공공매입을 주장한다. 깡통전세의 경우 이런 대책으로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시세보다 비싼 가격으로 전셋집을 인수하는 셈이지만 보증금 전체를 날리는 것보다는 낫다.
문제는 건축왕처럼 선순위 대출을 받아 챙긴 경우다. 집값이 대출과 보증금을 더한 수준까지 오르거나, 정부가 공공매입한 집을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임차인에게 매각하지 않는 이상 보증금을 찾기 어렵다. 부동산 전문가들이 시세 파악이 어려운 신축 빌라나 미분양 오피스텔은 전세를 피하고, 등기부 등본의 근저당 여부를 꼭 확인하라고 조언하는 이유다.
사기꾼에게서 받아내기도 쉽지 않다. 건축왕 남씨는 “재산이 8000억원이라 문제가 없다”고 피해자들에게 큰소리쳤으나 경찰 조사 결과 남은 재산은 8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미국에서는 4억5000만 달러(6000억원) 규모의 금융 사기를 친 사업가에게 징역 845년을 선고했다. 여러 범죄를 저지른 경우 개별 범죄마다 형을 매긴 뒤 합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개별 피해액이 5억원이 넘어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에 따라 3년 이상의 유기징역, 50억원이 넘어야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10억원짜리 전세 사기 5건을 합치면 무기징역이 가능하지만 1억원짜리는 1000건을 쳐도 15년이 한계다. 서민을 울리는 전세 사기범이 엄벌까지 피해 가니 더 답답한 노릇이다.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