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영화 봐도 러시아가 알쏭달쏭한 까닭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시어 같은 금빛 글들로 가득하다. 지금 읽으면 당연히 고어(古語) 투가 주는 고전미의 생소함으로 가득한데 앞부분이 다소 어색해서 그렇지 일단 한 번 빠지면 문학이 주는 정취가 남다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역시 마찬가지다. 솔직히 이들 작품은 오랜 세월에 비해 영화로 자주 만들어지지 못했는데 첫 번째 작품이 갖는 ‘위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러시아 문학과 역사가 지닌 이국적인 느낌을 올바로 살려내기가 도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러시아에 대해 논리보다 감성적 접근
영화 ‘닥터 지바고’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러시아 혁명사와 관련한 몇 가지 키워드를 알고 있어야 한다. 로마노프가의 차르(황제) 니콜라예비치 2세와 괴승 라스푸틴의 전횡, 제1차 세계대전, 블라미디르 레닌, 볼셰비키와 맨셰비키, 적군과 백군의 내전, 스탈린 독재 등이 그것이다. ‘닥터 지바고’의 3시간 10분에 걸친 얘기에는 이런 상황이 다 깔려 있다.
니콜라예비치 황제는 100년 전 일어났던 황실 근위대의 반란, 데카브리스트의 반란(1812년)을 왕가의 반면교사로 삼아 전제 권력을 철통처럼 방어했다. 그의 독재 권력을 지키는 근위대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온 기마병 민족 코사크였다. 1905년 니콜라예비치는 도도한 민심의 역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했다. 황제는 여전히 행정과 군사 외교권, 의회인 두마 해산권, 이 모두를 통제하는 국가평의회 의장직까지 독점했다. 그리고 이런 니콜라예비치를 좌지우지 하는 인물이 신승(神僧)이라 불렸던 라스푸틴이었다. 니콜라예비치 황제가 라스푸틴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제위를 물려줄 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가 혈우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희대의 코미디는 영국의 매튜 본 감독의 2021년 영화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이하 킹스맨)’에 묘사된다.
다시 ‘닥터 지바고’로 돌아가면 유리와 라라가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이자 이 영화의 가장 드라마틱한 씬으로 꼽히는 장면, 라라가 코마로브스키(로드 스타이거)를 파티장에서 총으로 쏘는 모습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의 일을 그린 것이다. 아직도 러시아에 귀족 주선의 파티가 남아 있었다는 얘기인데 여기에 코마로브스키 같은 신흥 부르주아와 유리 지바고 같은 인텔리들이 섞이는 분위기였음을 보여준다. 아직은 전제 군주, 곧 차르의 시대였던 셈이다.
라라가 코마로브스키를 쏜 것은 그가 엄마의 정부이면서 자신을 겁탈했기 때문이다. 전쟁에 나가 군의관과 간호사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라라와 유리가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자며 헤어지는 때는 황제가 타도되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던 시기이다. 볼셰비키와 레닌은 민생 안정을 이유로 즉각적인 종전을 주장한다. 반혁명파가 레닌을 독일의 첩자라 불렀던 이유다. 신공산정권 치하에서 다시 만난 유리와 라라는 다시 사랑이 불붙지만 이때부터 둘의 고생길이 열린다. 유리가 어느 쪽인지 모를 부대에 끌려가 동토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는 때는 1917~22년 사이이다. 러시아가 극도의 내란에 휩싸였던 시기. 적군(혁명파)과 백군(왕당파)으로 갈려서 싸우고 또 적군은 적군대로 볼셰비키와 맨셰비키로 갈려 싸웠던 때이다. 밖에서는 아직 세계대전이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통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웠던 때이다.
‘전쟁과 평화’ 역사보다 로망에 초점
영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는 모두 1800년대 초의 러시아 귀족사회를 그린다.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 사형에 처해진 니콜라예비치 2세의 큰 아버지 격인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하고(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진격해 오자 모든 보급선을 끊고 궁을 버린 채 퇴각해 결국 나폴레옹 군을 기근과 추위로 패하게 한 유명한 작전) 전제 군주의 위신이 하늘을 찌르던 때가 배경이다. 이후 왜 러시아 귀족사회가 흥청망청 망하게 됐는지를 문호 톨스토이는 간파했는데 그건 안나 카레니나 같은 신사고의 여성과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 라이트가 2013년에 만든 영민한 수작 ‘안나 카레니나’는 무도회의 군무를 원 씬 원 컷의 장면으로 찍으며 당시 사회가 얼마나 화려한 척, 그 아래에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 숨겨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사상에 취해 있던 한 남자가 전쟁을 겪으며 세상은 영웅이 아니라 민초들이 바꾸어 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다. 여인과의 사랑 역시 그 혼란의 과정에서 무르익는다. 할리우드 영화는 피에르(헨리 폰다)와 나타샤(오드리 헵번)의 대서사 로망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넷플릭스 최신작인 8부작 드라마 ‘외교관’도 러시아를 언급한다. 이제 러시아는 언제든 전술핵을 사용하겠다며 위협을 서슴지 않는 가공할 국가로 등장한다. 영국과 미국의 외교관들은 이런 러시아를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외교의 우회 라인을 통해 어떻게든 확전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 애쓴다. 영화는 늘 전쟁보다는 외교와 평화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가 직접 만든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를 볼 수 있다면 긴장 일변도의 대 러시아 외교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외교이다. 한때 ‘핑퐁(탁구)’이 그랬다. 외교가 영화를 활용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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