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패배 중독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애를 써 본 후에 해도 늦지 않아
리처드 예이츠, ‘패배 중독자’(‘직업의 광채’에 수록, 강경이·이재경 옮김, 홍시)
월터 헨더슨은 아내와 아이가 있는 평범한 가정의 25년 차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5월의 어느 금요일인 오늘, 그는 책상에서 일하는 척하고 있지만, 해고 통보를 기다리고 있다. 회사는 구조조정을 시작했고 누군가의 이름이 호명되면 부장의 방으로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출근 후 자신의 이름이 불리리라는 걸 직감한 초조한 월터는 주머니 속에 든 종이 성냥을 찢고 뭉갠다. 아홉 살 때, 그가 칭찬을 받던 놀이가 떠올랐다. 경찰-강도 놀이를 하던 친구들의 총에 맞아 죽는 척하는 연기. 친구들이 권총을 쏘면 월터는 우아한 포즈로 잠시 고통스럽게 서 있다가 언덕 아래로 굴러 시체처럼 바닥에 쭉 뻗었다. 그가 옷을 털고 일어나면 친구들이 찬사를 던졌다. 해고 통보를 기다리는 이 순간,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월터가 자신의 인생은 어쩌면 “그저 일이 터지길 기다리다가, 그 일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것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을 할 때 부장이 그를 호출했다.
“우리에게나 자네에게나 최선의 선택은 자네를 내보내는 일이라 결정했네, 지금 당장 말이야.” 부장은 뒤로 기대앉아 말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법이라고 덧붙이면서. 소심하고 두려운 월터는 퇴직금 수표를 받고 자기 자리까지 반듯하고 꼿꼿하게 걸어가려고 애썼다. 사무실을 나와 환한 대낮 거리 한복판에서 그는 당황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아직 집으로 들어가기엔 이른 시간이었고 벌써 아내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다. 그는 전화부스로 들어가 직업소개소들의 전화번호를 찾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일자리 이야기를 꺼냈던 친구에게도. 모든 일이 다 실패로 돌아가고 정말 인생의 패배자가 돼 간다고 느끼는 날이 있는데 월터에게는 그 금요일이 그랬다. 그는 공립 도서관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금요일 밤을 즐기고 싶어하는 아내가 술과 저녁을 마련해둔 집으로.
월터는 거듭 중얼거렸다. 버텨라. 오늘 밤, 내일, 또는 그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버텨라, 그냥 버텨라. 하지만 월터는 점점 더 힘겨워졌고 자신에게 늘 익숙했던 그 일, 바로 패배를 선언하고 싶어졌다. 상처받은 그는 카펫 가장자리에 간신히 멈춰 섰다.
누가 나에게 패배자라는 소리를 하는 것도, 나 자신이 나에게 패배 중독자라고 자조하듯 평가하는 것 모두 두렵다. 그랬다간 모두 사실이 돼 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일이 잘 안 풀리고 많은 일에 실망하고 상처받아도 어떻게든 버티려고 한다. 나 자신에게 패배를 선언하는 일은 더 애를 써 본 후에, 노력이란 걸 지금보다는 조금 더 해 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수동적인 패배 중독자로 만들기 전에.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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