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음악이 추모를 하는 방법

2023. 4. 28.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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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위한 노래 ‘레퀴엠’
남은 자들의 상처도 어루만져
음악, 슬픔을 마주보게 만들어
진정한 마음의 위로 갖게 해줘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 한국에서 유례없는 흥행을 했다. 2023년 개봉한 영화들 중 가장 오랜 시간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역대 국내 개봉 애니메이션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작품이 되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작품의 주인공인 스즈메가 일본 각지에서 발생하는 재난을 막기 위해 일본 곳곳을 누비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스즈메의 서사를 통해, 재난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더 구체적으론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했다. 감독은 재난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에 집중했다. 남겨진 사람들은 그 상처를 안고 결국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와닿았던 건 트라우마를 극복할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선 그 상처를 무작정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봐야 한다고 작품은 이야기했다. 이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치유인 것이다. 나 역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식에 크게 감동을 받고, 영화관을 두 번이나 찾았다. 그리고 두 번 모두 펑펑 울었다. 감독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수단으로도 동일본 대지진의 아픔을 섬세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음악도 지금까지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추모의 역할을 해왔다.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레퀴엠’이라는 장르가 작곡되었다. 대표적으론 모차르트와 베르디 그리고 브람스의 레퀴엠이 있다. 그리고 이 레퀴엠은 시대를 초월해 지금도 작곡되고 있다. 20세기에는 세계대전을 위한 레퀴엠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폴란드의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희생자들을 위해 레퀴엠을 작곡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전쟁 당시 사망한 동료들을 추모하기 위해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했다. 각 악장에는 희생된 동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엔 일본의 작곡가 도시오 호소카와가 ‘명상-2011 쓰나미 희생자들에게’(Meditation-to the victims of Tsunami 2011)를 작곡했다. 21세기에 작곡된 일종의 레퀴엠이다.

언급한 레퀴엠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단지 죽은 자들만을 위한 진혼곡이 아니라는 점이다. 레퀴엠의 말뜻은 ‘죽은 사람들을 위한 노래’지만 단지 그들만을 위한 작품은 아니다. 작품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건 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은 자들의 슬픔을 어루만져주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게 바로 이 레퀴엠이다.

그리고 레퀴엠들의 또 다른 공통적인 특징은 슬픔을 억지로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음악은 당시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슬픔을 상기시킨다. 대표적으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에는 ‘눈물의 날‘(Lacrimosa)이라는 순서가 있다. 레퀴엠 중 가장 직접적으로 슬픔을 표현하는 파트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눈물의 날’에서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결국 슬픔을 눈앞에서 마주해야 그 슬픔에서 비로소 해방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명상-2011 쓰나미 희생자들에게’ 역시 지진의 발생과 이로 인한 비극을 음악으로 재현하면서 시작한다.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덮치고, 평화를 찾기 위한 애처로운 기도로 마무리된다. 물론 밝고 기쁜 정서의 음악은 우리를 잠시나마 비극을 잊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우리를 치유해주진 못한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결국 그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데서 치유가 시작된다. 애니메이션에선 그 트라우마가 폐허로 묘사되고, 레퀴엠에서는 비극적인 음악으로 묘사된다. 우리 모두가 외면하고 있으며, 다시는 가고 싶지 않고, 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곳들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속 스즈메도, 또 레퀴엠 속 음악들도, 이 트라우마를 마주보며 우리를 다독인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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