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료 총대 멨다가 미운털’…정승일의 ‘한전 구하기’ 딜레마 [안옥희의 CEO 리포트]
“온누리상품권 줬다 뺏었다” 직원들 부글부글
33조 적자에 ‘20조 자구책’도 효과 미미
여당, “방만 경영·도덕적 해이 책임져라” 사퇴 촉구
[CEO 리포트]
정승일 사장이 한국전력공사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적자를 메꾸기는 사실상 힘들기 때문에 그의 미래 역시 불투명하다.
지난 2년간 정 사장의 경영 성과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다.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지낸 관료 출신인 만큼 그간 정부를 설득해 전기요금 인상을 끌어낼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거대 전력 공기업을 이끄는 한전 사장으로선 ‘리더십’도 ‘협상력’도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는 평가다.
공기업 맏형인데 尹 순방길 ‘패싱’
정 사장은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경제사절단에 포함됐지만,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됐다. 공교롭게도 경제사절단 명단 제외는 정 사장이 4월 21일 ‘뼈를 깎는’ 고강도 자구책을 다짐하며 전기요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읍소한 직후 발표됐다.
한전 측에선 이흥주 해외원전본부장이 경제사절단에 포함됐다. 정 사장을 제외한 한국수력원자력·한국석유공사 등 다른 에너지 공기업에선 모두 사장들이 직접 방미 순방에 동행했다.
한미 양국이 이번 미국 국빈 방문을 계기로 에너지 협력을 석유·가스 중심의 전통 에너지 분야에서 소형 모듈 원자료(SMR)·원전·수소 등 청정에너지 분야로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만큼 정 사장이 동행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순방에선 총 23건의 업무 협약(MOU) 중 수소·원전 청정에너지 분야에서만 13건이 체결됐다.
정 사장이 남은 임기를 채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에게 부여된 임기는 2024년 5월까지다. 2022년 33조원에 육박하는 대규모 적자를 낸 한전은 전기요금 정상화가 절실한 상황이다.
하지만 2024년 총선을 앞둔 정부·여당이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면서도 2023년 2분기 전기요금 인상 결정을 미루고 있어 한전의 경영 정상화 계획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기요금 인상은 어느 정부에서나 ‘인기 없는 주제’지만 전력의 안정적 공급과 미래 에너지 투자 등 한전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선 필수다.
요금 인상 급한데…한전공대 표적 감사·사퇴 압박
여당에선 지난 정부 기조에 맞춰 한전이 추진했던 정책과 관련해 연일 맹공을 쏟아붓고 있다. 한전 일부 직원 가족의 태양광사업 비위·비리 의혹과 한국에너지공대(한전공대) 입학식 감사 결과 은폐 의혹이 대표적이다. 최근 제기된 한전공대 입학식 비용 과다 사용 논란에 대해서도 산업통상자원부가 감사에 착수했다.
정부·여당은 전기요금 인상에 앞서 고강도 자구책부터 내놓으라고 촉구하고 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원장은 4월 28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정 사장을 향해 “국민에게 전기요금을 올려달라고 하기 전에 최소한 염치 있는 수준의 강도 높은 자구노력을 여러 차례 주문했음에도 (뚜렷하게 제시된 게 없다)”면서 “방만 경영과 도덕적 해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일각에선 정 사장이 탈원전과 신재생에너지 중심의 문재인 정부 에너지 정책 기조에 보조를 맞춰온 만큼 ‘지난 정부 인사 찍어내기’ 신호라는 해석도 나온다. 정 사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지내고 한전 사장으로 임명됐다.
회심의 임금동결 카드…하지만 성과급 제로(0) 관측도
정 사장은 자구책 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전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20조원대 재정 건전화 계획을 추진할 방침이다. 한전은 임직원 임금 인상분과 성과급 반납 등 사실상의 임금동결 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직원들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관련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간담회도 6차례 개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과급 반납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오는 6월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경영평가) 등급 발표 이후 성과급 지급 여부가 결정되는데, 한전이 대규모 적자를 지속하고 있는 만큼 ‘D’나 ‘E’ 등급을 받을 수 있어서다. 경영평가에서 D·E등급을 받으면 성과급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한전은 2022년에도 정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성과급 전액을, 1급 이상 주요 간부는 성과급의 50%를 반납했다.
비핵심 자산 매각은 이미 추진 중이다. 부실 자회사 정리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한전은 이명박 정부 시절 석탄 가스화 복합 화력(IGCC) 가스화 공정 원천기술 도입·공동사업 추진을 위해 설립된 출자회사 ‘켑코우데’를 청산하기로 했다. 2011년 설립 후 단 한 건의 수주 실적도 기록하지 못했고 2016년부터 자본잠식에 빠진 상태기 때문이다.
뼈 깎기 전 10만원 상품권 회수부터…“일할 맛 안 나”
자구 노력에 잡음도 불거지고 있다. 최근엔 근로자의 날을 맞아 한전이 전 사원에게 지급했던 온누리상품권 10만원을 다시 회수해 직원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한전은 매년 근로자의 날에 온누리상품권을 지급해왔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선 “백화점상품권도 아니고 사용처가 한정된 온누리상품권을 주면서 줬다가 뺏기가 어디있냐”, “직원들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등 비판적인 반응이 대다수다.
한전의 한 직원은 온누리상품권 지급이 복지 지원 차원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직원은 “월급의 일부를 분할해 온누리상품권을 강매한 거고 세금도 떼서 실수령은 더 적고, 다른 사람들이 10% 할인받아서 온누리상품권을 살 때 우리는 원가에 풀매수하고 있다”고 했다.
한전은 2020년에도 직원들의 9월 급여 중 약 100만원(105억원 상당)을 현금이 아닌 온누리상품권으로 지급해 내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정부가 공기업들에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성과급 일부를 지역 상품권으로 지급하라고 권고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한전은 급여 중 일부를 온누리상품권으로 지급하면서 코로나19 여파와 집중호우 피해로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취지를 내세웠지만, 직원들 사이에선 “월급으로 대출 이자도 갚아야 하는데 온누리상품권은 처치 곤란”이라며 “내년도 경영평가에 반영될까봐 반강제로 정부 권고를 따른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나왔었다.
‘빚으로 빚내 돌려막기’…전기료 못 올리면 올해도 10조 적자
업계에선 뼈를 깎는 자구책도 결국 전기요금 인상 없이는 ‘언발에 오줌 누기’라고 지적한다. 한전의 적자는 올해도 1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한전의 부채 비율은 2021년 223%에서 2022년 459%로 급등했다.
한전은 2022년 세 차례에 걸친 전기요금 인상에도 불구하고 적자 규모를 줄이지 못했다. 2021년(5조 8465억원)의 5.5배를 웃도는 32조 6034억원의 적자를 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다.
운영자금이 없는 한전은 회사채 발행으로 연명하고 있다. 2022년에만 31조 8000억원의 한전채를 찍어냈고, 올해도 9조 350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국채와 다름없는 한전채가 쏟아지면서 유동성을 모두 흡수해 2022년 레고랜드 사태에 앞서 자금시장 경색을 불러온 것처럼 채권시장 교란과 자금경색이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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