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사장님’은 어떻게 강도살인범이 됐나… ‘강남 납치살해’ 전말

백준무 2023. 4. 2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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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납치·살인’ 사건의 발단은 ‘코인’이었다.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 알려진 주범 이경우(35)는 원래 ‘헬스장 사장님’이었다. 경기 성남시에서 2년 넘게 운영했던 헬스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2020년 5월 폐업했다.

이경우는 군대 동기의 권유에 따라 가상화폐 투자를 시작했다. ‘퓨리에버’라는 신생 가상화폐에 투자한 8600여만원은 금세 휴짓조각이 됐다. 2020년 11월 한 국내 거래소에 상장된 퓨리에버 가격은 당시만 해도 개당 1만원이 넘었다. 4개월 뒤 퓨리에버 시세는 715원까지 떨어졌다.

이 무렵 이경우는 납치·살인 피해자 40대 여성 최모씨를 알게 된다. 가상화폐 발행업체와 투자자를 연결해주는 일을 하던 최씨는 “퓨리에버 시세를 조종해 가격을 폭락시킨 이들이 있다”며 투자자를 모집한 유상원(50)·황은희(48) 부부를 지목했다. 2021년 3월 이경우와 다른 투자자들은 최씨와 함께 유씨 부부가 살고 있던 곳으로 난입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유씨 부부로부터 4억원을 갈취한 것으로 조사됐다.

9일 '강남 납치·살해 사건'의 피의자로 구속된 용의자 3인조 중 이경우(36)가 서울 강남구 수서경찰서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이경우·유씨 부부, 살해 뒤 코인 나눠갖기로

최씨가 가상화폐 관련 사업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경우는 최씨에게 접근했다. 최씨의 사업에 동참하면 자신도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경우는 최씨 밑에서 6개월여간 일하면서 한 번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

이경우는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유씨 부부 쪽에 붙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씨 부부가 가상화폐 투자로 최씨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당시 유씨 부부는 최씨와 분쟁 중이었다. 상장 전에 퓨리에버를 매수하려고 자신들의 돈 1억원을 포함해 모집한 31억원 상당의 이더리움을 최씨에게 전달했지만, 최씨가 이를 빼돌리려고 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우는 유씨 부부와 최씨 사이의 갈등 관계에 착안해 최씨 측 정보를 유씨 부부에게 빼돌리기 시작했다.

이경우가 범행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도 이때쯤이다. 유씨 부부로부터 “최씨가 보유한 가상화폐 자산이 수십억원 상당일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이경우는 지난해 7~8월경 유씨 부부에게 “최씨를 조용히 처리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이경우는 최씨를 살해해 가상화폐를 빼앗는 한편, 유씨 부부의 환심을 사서 동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유씨 부부와 이경우는 최씨가 가진 가상화폐를 나누기로 합의했다. 유씨 부부는 자신들이 투자했던 만큼 갖고, 나머지는 모두 이경우가 가지기로 한 것이다.

서울 강남 40대 여성 납치·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재력가 부부 유상원, 황은희가 13일 오전 서울 수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와 일면식 없는 ‘조폭 지인’ 끌어들여

유씨 부부로부터 착수금 명목으로 7000만원을 받은 이경우는 대전 지역 조직폭력배 황대한(35)에게 연락했다. 황대한과는 과거 대학에서 알게 된 친구 사이였다. 최씨와 일면식이 없는 황대한이 범행을 실행하면 수사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황대한은 과거 운영했던 배달대행업체 직원 연지호(29)와 이모(23)씨를 끌어들였다. 황대한이 연지호에게 “일단 우린 (최씨와) 연관성이 없다고 했잖아. 우린 용의선상에서 배제다. 수사기간도 오래 걸린다”고 말한 차량 블랙박스 영상도 검찰 수사를 통해 확보됐다. 이경우의 아내인 간호조무사 허모(36)씨도 범행 준비를 도왔다.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마취제 5㏄ 1병을 빼돌려 남편에게 전달했다.

(왼쪽부터) 강남 납치·살해 사건'의 피의자 이경우, 연지호, 황대한. 뉴스1
6개월 이상 범행을 준비한 황대호와 연지호는 지난달 29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서울 강남구 최씨 집 인근에서 최씨를 납치한 뒤 차량에 태우고, 마취제를 주사했다. 최씨를 협박해 가상화폐 거래소 계정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약물 중독으로 숨진 최씨를 대전 대덕구 야산에 암매장했다.

범행 당일 이경우 등이 최씨의 가상화폐 거래소 계정에 접속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실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다. 경기 용인시 한 호텔에서 만난 이경우와 유상원은 황대호에게 들은 비밀번호로 최씨 계정에 수차례 접속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취제로 인해 의식이 흐린 상태였던 최씨가 잘못된 비밀번호를 불러줬기 때문이다.

쓸모가 없어진 최씨의 휴대전화는 이경우 아내 허씨를 통해 황은희에게 전달됐다. 황은희는 부산으로 내려가 유람선을 타고 휴대전화 4대를 바다에 버렸다. 이 기기들은 수사 과정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 3월 29일 오후 11시48분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발생한 납치사건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CC)TV 장면. 연합뉴스
◆황은희, 수감 중 노트에 “피해자 원망스러워”

이 사건은 초기부터 범행 동기를 둘러싼 다양한 추측이 쏟아졌다. 유씨 부부가 범행을 전면 부인해 범행 동기를 규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검찰은 보강수사 과정에서 투자계약서를 입수하는 한편 휴대폰 포렌식을 통해 문자메시지와 통화녹음 파일 등을 복구했다.

특히 이달 21일 서울구치소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황은희의 쪽지와 노트가 결정적 단서가 됐다. 황은희는 구속 이후 범행과 관련된 개인적인 생각이나 검찰 수사 대비 계획 등을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경우에게 준 7000만원의 성격을 진술한 내용, 검사가 계속해서 추궁하더라도 굴복해선 안 된다는 내용, 변호사와 상의 없이 검찰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내용과 함께 최씨로부터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한 데 대한 원망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성한 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 “수감 이력이 많은 피의자들은 구치소 압수수색까지 충분히 예상하고 대응하는데, 황은희의 경우 이전에 수감된 적이 없다보니 별도의 노트까지 구입해서 이 같은 내용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검 전담수사팀(팀장 부장검사 김수민)은 28일 유씨 부부와 이경우, 황대한, 연지호, 이씨 등 6명을 구속기소했다. 허씨 또한 강도방조, 절도, 마약법 위반(향정)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이경우가 유씨 부부로부터 수수한 범행자금 7000만원은 법원으로부터 추징보전명령을 받아 집행했다.

이날 사건 브리핑을 담당한 김 부장검사는 “전담수사팀 검사가 직접 공판에 관여해 빈틈없는 공소유지를 함으로써 피고인들에게 죄에 상응하는 중형이 선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백준무 기자 jm10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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