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객열전] '중꺾마'로 시련을 극복한 박지현
50대 나이에도 정상을 꿈꾸는 불굴의 의지
[스포츠한국 홍성완 기자] 지난해 기적적으로 16강에 진출한 우리 축구 대표팀으로 인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줄임말인 '중꺾마' 단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뜻으로 말이다. 여자 당구 선수에도 중꺾마를 연상시키는 선수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1세대 여자 3쿠션 선수 중 한 명인 박지현(52) 프로.
그는 2000년대 초반 불모지와 같았던 여자 당구계에서 이름을 날렸다. 30세의 늦은 나이에 무작정 당구를 시작한 이후 20년 이상 이어온 선수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특히 세 번의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난 박지현의 당구 인생은 처절했다. 그를 지금까지 지켜준 버팀목이야말로 중꺾마의 일념이 아니었을까.
◆부상으로 포기한 육상 선수와 여군
무작정 집을 나와 선택한 당구의 길
박지현은 원래 육상 선수였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단거리 육상선수의 꿈을 이어갔다. 그러나 무릎 연골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해 육상을 접어야만 했다.
"저는 원래 육상을 오랫동안 했었기 때문에 몸이 그 운동 습관에 길들여진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치고 나서 운동을 못하게 되니까 다른 도전을 하게 됐죠. 어릴 적부터 직업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하지만 무릎을 다친 이후 제대로 된 운동을 못하다 보니 결국 군인의 길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어요."
운동선수의 삶과 직업군인에 대한 꿈이 모두 좌절되면서 박지현은 생계를 위해 이런 저런 장사를 하면서 목표가 없는 세월을 흘려보냈다. 삶의 생동감이 부족하자 결국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스물아홉 가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인생에 대한 회의감에 시달리고 있었죠. 꿈꾸던 것들은 모두 할 수 없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뭔가에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그런 절실함이 심하게 찾아왔어요. 그런데 어린 시절 식사 시간에 오빠를 불러오라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당구장에 찾아갔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거예요. 무엇인가 절박하던 그 순간 스치면서 잠깐 봤던 당구 테이블과 빨간공, 노란공, 하얀공이 왜 연상됐는지 모르겠어요. 당구를 한 번도 쳐 본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이끌림이었다. 박지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그 생각 하나로 무작정 집을 나섰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발동된 생존본능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에 대한 회의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무의식 상태에서 작용했나 봐요. 그래서 무작정 가방 하나 둘러메고 고향인 전주에서 경기도 안산으로 갔어요. 그리고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제법 커 보이는 당구장에 가서 '저 일 좀 시켜주세요'라고 부탁드렸죠. 그 당구장 사장님이 '우리가 사람을 쓸 그런 형편이 아니다'라면서 거절하셨지만 그래도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매달렸어요. 결국 그 당구장에서 일을 하게 됐고 당구를 접하게 된 겁니다."
손님들이 당구를 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박지현은 자연스럽게 큐를 잡았다. 운동선수 출신답게 처음부터 자세가 잡혔다.
"운동 신경이 아직 남은 탓인지 큐대를 잡고 공을 굴리자 주변 분들이 '자세가 나오는데'라면서 칭찬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때가 당구인생의 첫 시작이었죠."
운동선수 출신들은 대부분 승부욕이 강하다. 육상을 했던 박지현 역시 승부욕이 강했고 3쿠션으로 입문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4구를 치면 마무리는 결국 3쿠션이잖아요. 4구로 점수를 내서 이기다가도 마지막 3쿠션에 가서 늘 지는 거예요. 그게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차라리 3쿠션을 배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3쿠션에 도전했습니다."
이때 박지현의 나이가 30살이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운동 신경이 뒷받침이 됐는지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여성 당구 선수가 드문 시절이라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고향인 전북당구연맹에서 대표 선수로 출전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올 정도였다.
"2004년, 그러니까 제가 33~34살쯤이었을 거예요. 전북 연맹에서 도 대표로 출전해 달라고 해서 얼떨결에 나간 대회가 인터넷 방송 대회였어요. 너무 긴장되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손이 막 떨리더라고요. 결국 최하위로 대회를 마쳤어요."
3쿠션 대회를 처음 경험한 박지현은 이후부터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 폭을 넓히고 본격적으로 여러 대회를 섭렵했다. 초창기 3쿠션 여자 선수를 대표하는 오지현·박수아 선수 등과 겨루면서 우승도 일궈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한당구연맹 선수로 합류해 선수 활동을 시작했다.
◆ 만삭의 몸으로도 우승 일군 저력
LPBA 입문 후 발목을 잡은 '나이'
이후 박지현은 꾸준한 성적을 내면서 국내 1인자 자리까지 올라가는 저력을 보여줬다. 특히 만삭의 몸으로 우승까지 거머쥔 사례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일이다.
"2008년도 여름이었을 거예요.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였어요. 강원도 양구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그때 출산이 얼마 안 남았을 때였거든요. 결승전에서 꼭 쳐야 할 공이 있었는데 공 배치를 해결하려면 많이 엎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혼잣말로 뱃속 아이에게 '아기야 정말 많이 미안해'라고 한 뒤 테이블에 바로 엎드렸어요. 만삭인 배가 눌리는 상황에서 오로지 공만 보고 친 거죠. 그렇게 해서 우승했는데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정말 그때 아이에게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 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최강자의 자리에 오랫동안 군림한 박지현은 당구 전문 채널인 빌리어즈TV가 출범할 당시 프레드릭 쿠드롱, 다니엘 산체스, 이신영 등 당시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함께 개국 방송을 함께했다.
"제가 당구 전문 채널의 개국 방송을 함께 했다는 것에 나름 자부심이 강해요. 당시에 그만큼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의 당구 인생은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이신영 선수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치고 올라오자 어느새 2인자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육아와 생계에 전념하면서 성적은 계속 밀려났다.
"PBA가 처음 출범할 당시 제가 당구연맹 랭킹 12위를 기록했어요. 그게 저한테는 가장 낮은 순위였거든요. 이 상태에서 LPBA에 도전하는 게 왠지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내고 나서 프로에 도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박지현의 목표는 곧 현실이 됐다. 2019년 9월에 열린 '태백산배 전국3쿠션 당구대회'에 결승까지 올라 당시 최강자의 반열에 오른 스롱 피아비 선수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2016년 11월 대한체육회장배 이후 3년 만의 우승이었다.
곧이어 그 해 11월에 열린 '제8회 부산광역시장배 전국3쿠션 당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랭킹이 3위까지 수직 상승했다. 그리고 PBA 출범 이듬해 LPBA에 합류했다. 하지만 LPBA의 대회 규정과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낯선 서바이벌 방식의 예선전은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줬다.
더 큰 좌절은 나이 문제였다. 국내 여자 랭킹 3위였지만 그를 불러주는 팀은 한 곳도 없었다.
"팀 리그 관계자 분에게 선출 조건이 뭐냐고 직접 물어봤어요. 에둘러 이런 저런 기준들을 말했지만 결국 스타성이 필요하다는 거였죠. 그러면서 저에게 '박지현 선수는 그냥 즐기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더라고요. 결과적으로는 나이가 많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거죠. 정말 그때 좌절감이 컸어요. 육상과 여군의 길을 포기한 이후 두 번째로 삶의 회의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 약으로 버티는 교통사고 후유증
시련 딛고 기본기부터 '영점' 조정
마음의 상처를 받은 박지현은 결국 1년여 동안 당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2021~2022년 시즌에서도 서바이벌 예선 탈락을 거듭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은 그는 2022~2023 시즌부터 성적을 끌어올렸다.
지난 3월에 열린 'SK렌터카 LPBA 월드챔피언십 2023'에서는 비록 준결승에서 김가영(하나카드) 선수에게 패하긴 했으나 오랜만에 이름값을 한 대회였다. 특히 그는 30대 때 교통사고를 겪은 이후 2021년에 이어 2022년에도 교통사고를 연이어 당해 큰 후유증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약을 먹고 이를 악물면서 이뤄낸 성적이어서 더 값진 결과였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지금도 약을 먹으면서 버티고 있거든요. 정말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공을 치고 있어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당구가 점점 더 발전하는데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더라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그리고 발판이 되는 선수로 남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박지현은 선수들을 위한 전용구장을 운영하면서 본인도 기본으로 돌아가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월 말부터 선배가 운영하는 연습구장을 같이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저도 연습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나이가 들면서 여러 한계들이 느껴져 기본기부터 다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나이에 친한 선배로부터 레슨도 받고 있어요."
팀 리그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당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면서 담금질에 들어간 박지현. 그는 새 시즌부터 우승권을 정조준하고 있다.
"최근에 가영이(김가영)하고 준결승전에서 정말 멋지게 경기하고 싶었는데 끝나고 미안하더라고요. 좀 더 멋진 경기를 같이 해보고 싶었는데 아프다는 핑계로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우선 재활치료에 최선을 다하면서 몸 상태를 끌어올려 올해 2번 이상 우승, 그리고 왕중왕전 4강 이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박지현은 마지막으로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2021년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월드챔피언십 준결승까지 진출하자 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상금보다 더 큰 금액을 보내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정말 제가 다시 살 수 있게 해준 게 당구고 지금도 그 당구와 응원해 주시는 팬들 덕분에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땀 흘리며 연습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죠. 항상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포츠한국 홍성완 기자 seongwan62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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