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 않는 열차를 멈춘 영웅들…누구도 남겨지지 않는 사회를 꿈꾸다[책과 삶]
박길연·박김영희·박명애·이규식·박경석·노금호 6명의 생애사
전사들의 노래
비마이너 기획·홍은전 지음·훗한나 그림|오월의봄|404쪽|2만1000원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한 개인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먼저 자신이 각성하고 변화하고, 고난과 역경에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하는 이야기. 사람들은 영웅이 탄생하고 승리하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런데 이런 영웅들은 어떤가.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지 않는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회에 맞서, 고난과 역경을 조건짓는 사회구조에 대해 질문한다. 그들의 승리는 고난과 역경이 더 이상 고난과 역경이 아닌 것이 되는 순간 주어진다. 이런 영웅들을 홍은전은 ‘전사’라고 부른다.
“장애인운동은 사회를 완전히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합니다. ‘내가 아프면 어떻게 하지’가 아니라 ‘사회가 어떻게 해주지’라고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지는 거죠. 노동, 교육, 교통 등 사회의 모든 제도·구조가 장애와 연결되어 있어요.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바꾸는 저항적·변혁적 운동입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시위는 지난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전장연은 출근길 열차를 멈춰 세웠다. 장애인 이동권·교육권·노동권·탈시설 및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필두로 비난과 혐오 발언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지하철 역사에서, 또 인터넷에서 벌어진 ‘전쟁’ 속에서 전장연의 존재감은 또렷해졌다. 있어도 보이지 않는 희미한 ‘낮달’ 같은 존재였던 장애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홍은전은 “아름답고 토할 것 같은 4월이었다”고 말했다. “혐오 발언의 심각성을 잘 몰랐어요. 그것이 칼이구나, 총이구나라는 것을 느꼈죠. 누구나 장애 문제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걸 보고 한편으론 ‘너무 아름답다, 사회가 듣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비문명적, 민폐, 이기적, 강자’라고 장애인을 공격하는 말들에 마음이 굉장히 힘들었고요.”
<전사들의 노래>는 장애인운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꾸고, 다른 이들의 삶을 바꾼 박길연, 박김영희, 박명애, 이규식, 박경석, 노금호 6인의 생애를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이 기록했다. 6인의 이야기는 서로 결이 다르지만, 겹쳐지고 만났다가 헤어진다. 결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싸움에 대한 이야기 속에 장애인운동의 역사가 있고 사회의 변화가 있다. 비마이너 기획으로 연재했던 글들을 책으로 엮었다.
끊임없이 효율·성과로 사람 나누는 사회
‘서지 않는 열차’에 빗대
저자 홍은전 “차별에 맞서 저항하며 산다는 게 뭔지 전해야 했다”
가장 ‘약한’ 존재였던 이들이 불러온 변화는 눈부시다. 노들야학에서 13년간 활동하며 장애인운동과 ‘사랑’에 빠졌던 홍은전이 쓴 이들의 생애사는 읽는 이의 마음을 낚아채는 데 성공할 수밖에 없다. 한때 홀딱 사랑에 빠졌던 이가 쓰는 연가이며, 헤어진 후의 그리움을 털어놓는 고백이며, 다른 방식으로 곁에 머물기로 한 연대의 편지이기도 하다. 홍은전을 지난 25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2018년 세상을 떠난 장애인 열사들의 삶을 기록한 <유언을 만난 세계>를 펴냈습니다. 죽은 사람의 삶을 쓴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어요. 당사자에게 확인받을 방법이 없으니까 기록으로서 큰 한계가 있는 것 같았어요.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만들어온 이들이 자기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을 때 기록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장애를 갖고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저항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인천지역 장애인운동을 일궈낸 박길연, 장애여성공감을 만들어낸 박김영희, 대구지역의 장애인운동을 이끌어온 박명애·노금호, 뇌병변장애에도 불구하고 탈시설운동에 헌신해온 이규식, 24년간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장을 지난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박경석이 주인공이다.
장애인이자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며 장애여성공감을 만든 박김영희와 박길연, 박명애 등 여성 장애운동가들의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홍은전은 “대구나 인천지역 장애운동가들, 남성 장애인에 비해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길연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장애가 생긴 중도장애인이다. 남편과 헤어지고 자립한 그는 16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가 장애인운동과 만난다. 아픈 아이를 앞에 두고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그에게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지원서비스를 요구하는 투쟁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다. ‘뭔가에 홀린 듯’ 빠져버렸다. 길에서 사탕을 팔아 민들레장애인야학을 만들고 시설에 갇혀 나오고 싶어 하는 장애인을 무작정 데리고 나온 후 탈시설운동을 벌였다. “자신이 인간임을 알게 해주는 삶, 자유가 있는 삶,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를 누리는 삶. 그 희열을 누구보다 내가 알죠.” 그는 말한다.
장애여성공감을 만들고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박김영희는 “지도로 그려진 적 없는 세계에 태어난 사람이 미지의 땅을 탐험하면서 스스로 지도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애인이자 여성으로서 겪는 이중의 차별에 대해 설명할 길 없던 그는 치열하게 ‘여성 장애인’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설명할 언어를 찾아간다. 2000년 강릉에서 지체장애 여성이 동네 남성들에게 7년간 성폭력을 당해온 사건을 접한 뒤 장애여성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고 장애여성 성폭력상담소를 운영한다. 장애인운동의 남성 중심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전체 사회운동의 비장애인 중심성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이규식은 뇌병변을 가진 중증장애인이 어떻게 삶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주체로 설 수 있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1999년 서울 지하철 혜화역에서 리프트를 타던 중 추락해 다친 그는 장애인 이동권 운동에 불을 지폈다. 한강대교를 기어서 건너 노들섬으로 가는 투쟁으로 활동지원서비스가 시행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언어장애를 가졌기에 그의 진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려웠다. 홍은전은 이규식의 이야기를 나중으로 미루고 미루다 책에서 빼려 했었다고 털어놨다.
“이규식은 언어장애가 있어서 말하고 듣는 데 서너 배 시간과 노력이 들어요. 나중에, 나중에 하면서 미뤘죠. 앞에 쓴 다섯 명의 이야기도 이미 책 한 권 분량을 넘어선 상태였어요. 그러다 깨달았죠. 내가 하는 생각이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논리와 똑같구나.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고, 원고를 줄이고 재구성하려면 힘이 든다는 건 사회질서를 바꾸기 싫다는 논리와 같았죠. 이규식은 훌륭한 전사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장애를 이유로 이야기할 기회를 잃어와 사람들이 그의 노고를 잘 몰랐어요. 이규식을 빼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대구에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이끌어온 노금호는 척수성 근위축증이라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워왔지만 급속히 진행된 질병으로 지금은 일상을 꾸리는 것도 힘든 상태다. 척수성 근위축증 치료제 스핀라자는 1회 주사비용이 1억원에 달해 건강보험 적용 없이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만 3세 이전 증상 발현’을 증명하지 못하면 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그는 질문한다. “장애인운동은 삶을 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전장연이 대답했다. 전장연은 지난해 2월부터 희귀질환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 확대 등을 요구하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싸우는 장애인’의 상징과도 같은 박경석은 “누구도 남겨두지 마라(Leave No One Behind)”라고 말한다.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가르다 추락해 하지마비가 된 그는 백발이 성성한 지금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최중증 발달장애인까지 시설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향한 꿈이다. 기타를 치고 하늘을 날던 ‘낭만주의자’는 아직도 박경석 안에 있다.
수십년간 집과 시설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자 사회가 바뀌었다.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생기고, 저상버스가 도입됐다. 활동지원서비스는 혼자서는 화장실 가기도 힘든 중증장애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싸우는 만큼 매해 제도가 달라졌어요. 봉고차로 데리러 가지 않으면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 2008년부터는 자기 삶을 살고 있죠. 활동지원서비스는 중증장애인들이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혁명적 제도예요. 도움과 선의 없이 살 수 없었던 이들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게 된 거죠.”
홍은전은 13년간 머무른 노들야학을 2014년 떠났다. “책임감과 의미만으로 계속하기가 어려웠어요. 한곳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상처받고 지치기 마련이잖아요. 마지막으로 노들야학 20년 역사를 정리해 글로 쓰는 작업을 하면서 노들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 갈등과 성장, 사회 변화와 영향을 치열하게 복기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됐어요. 기록이란 게 이런 힘이 있구나라는 걸 알게 됐죠.” 글쓰기는 그를 인권기록활동가의 길로 이끌어주었다. 현재 비장애인 활동가들을 인터뷰해 비마이너에 연재하고 있으며, 내년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준비하는 기록 작업을 하고 있다.
책의 부제는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다. ‘서지 않는 열차’는 로켓이 속도를 높이기 위해 연료통을 버리듯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을 버려가며 달리는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은유다. 그 열차를 멈춘 장애인들의 삶과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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