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정치박박] `주어` 탓 말고 `주체` 돌아보고, 책임정치해야

한기호 2023. 4. 2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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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일로 日 무릎? 못 받아들여'
"尹 주어 말안해, 오역"탓한 與 망신
WP기자의 '주어' 녹취록…尹 책임으로
野선 주어·목적어 바꾼 '비난 위한 비난'
北 놓고 "호갱외교" 주체도 돌아봐야
국정주체가…? 金여사 행보과시는 악재
WP(워싱턴포스트) 도쿄/서울지국장인 한국계 미셸 예희 리 기자가 지난 4월25일 자신의 트위터에 윤석열 대통령의 WP 인터뷰 녹음 일부의 녹취록을 직접 풀어 공개했다. 윤 대통령이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 대목을 들어, 대통령이 언급하지 않은 주어(I)를 삽입한 '오역'을 토대로 보도했다는 국민의힘 측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지난 4월24일 미국 국빈방문차 출국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서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하고 있다.<대통령실 제공·연합뉴스>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4월25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관저에서 열린 친교행사에서 작성한 방명록. 윤 대통령은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우리의 글로벌 동맹을 위하여"라고 기록했다. 김 여사도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로서 윤 대통령과 함께 서명했다.<공동취재·연합뉴스>

정치권에서 '주어 논란'이 횡행했다. 중심엔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 2021년 10월 중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이던 그에 대해 "'대충' 던진 한마디가 캠프와 조력자들에게 (수습) 열마디를 쏟아내게 만드는 패턴"의 원인을 "무절제와 다른 무정제"라고 지적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일주일간 120시간 바짝 근로', '부정(不定)식품 선택할 자유' 같은 발언으로 시끄러울 때였다. 원래의 발언을 온 국민에 '주 평균 120시간 근로'를 시킨다거나, '불량(不良)식품'을 권하겠다는 악의(惡意)로 해석해서는 아니었다.

민감한 의제인데 국민 평균 눈높이와 감정선에서 가장 먼 최극단 예시를 들거나,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 반복되면 또 사고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 국민 대표성이 가장 큰 선출직에 올라서도 같은 말실수를 한다면, 정밀하게 논의해야 할 현안마다 '극단사례를 일반화시켜 반대하는' 논법을 허용해 담론 자체가 설 곳을 잃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우려가 현실이 됐다. 국빈 방미 직전 WP(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 남긴 대일(對日)관계 관련 '100년 전 일로 무릎 꿇으란 건 받아들일 수 없다' 발언 논란이다.

28일 공표된 한국갤럽 자체 주례여론조사(지난 25~27일·전국 성인 1001명·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포인트·유선 5% 무선 95% RDD 전화면접·응답률 10.2%·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를 보면 윤 대통령 직무 긍정평가는 지난주 4%포인트 반등했다가 1%포인트 도로 내린 30%, 부정평가는 3%포인트 반등한 63%로 각각 나타났다. 긍·부정 이유 1순위는 '외교'인데, 특히 부정평가 쪽은 '발언 부주의'(6%)가 4위였다. 한주 간 4%포인트 올라 4계단 상승했으니 설화(舌禍) 때문이랄 수밖에.

지난 24일 WP는 윤 대통령이 "나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거나, 일본이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용서를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즉각 국내에 파장을 일으켰다. '100년 전의 일'로 뭉뚱그린 어휘부터 패착이었다. 합의점 도출 시도라도 해 온 종군위안부 문제와 징용 동원 현안인지, 국민 절대다수가 일본이 적어도 부채의식을 지녀야 할 죄과로 여기는 식민지배 그 자체를 가리켰는지 특정하지 않은 탓이다.

가장 후자의 의미라면 정권 존립마저 좌우할 수도 있다. 발언 당사자인 대통령이 직접 해명하라는 요구가 단순 반대진영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대통령을 역성 들겠다는 여당의 무리수로 '설상가상'이 됐다.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24일 논평으로 비판론을 더불어민주당의 가짜뉴스로 치부하며 "(윤 대통령은) '주어'를 생략한 채 해당 문장을 사용했다. 그리고 해당 문장은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실 버전 인터뷰 발언문을 근거 삼아 '나(I)'는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유럽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일본에)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는 내용이었다. '여당의 입'은 또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역(誤譯)을 가지고, 민주당은 '실제 발언은 확인하지도 않고'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나선 것"이라고 했다. 국민 문해력을 시험한 이 말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외신 오역이란 책임 전가에, WP 도쿄/서울지국장인 한국계 미셸 예희 리 기자는 25일 트위터에 인터뷰 녹취록을 공개했다. '주어'는 명확했다. "100년 전에 일…(중략)…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공개 이후 유상범 수석대변인은 발언을 철회했고 지도부는 '취지'를 보라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리 기자가 친윤 강성지지자로부터 인터넷상 인신공격 테러마저 당할 동안, 정부·여당 그 누구도 책임지는 언행을 보이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결자해지를 택할지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외에도 '주어'가 얽힌 정치권 백태를 돌아보게 된다.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를 계기로 넷플릭스가 한국에 4년간 25억 달러(약 3조3000억원) 투자한다고 밝힌 직후인 25일, 양이원영 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윤 대통령이 넷플릭스에 3조3000억원 가량을 투자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왜 투자하나?", "지금 해외에 투자할 때인가? 투자를 끌어와야 할 때 아닌가?", "윤 대통령 개인 투자가 아니라면 국민연금 등 연기금인가", "생각없이 퍼주기 할까봐 불안불안하다" 등 상상력에 기반한 비난을 쏟아냈다.

몇분 지나지 않아 양이 의원은 해당 글을 지우고 새 글을 올렸다. '연 8000억원대 투자 약속은 문재인 정부 때도 있었기에 전혀 새롭지 않다'는 뉘앙스의 주장으로 바뀌었다. '주어와 목적어'를 뒤집은 전제와 '생각없는 퍼주기'라는 주장엔 사과 대신 "거꾸로 오해했는데 다시 확인했다"는 얼버무리기로 끝이었다. 그 직후 나온 주장도 '비난을 위한 비난'의 연장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총 59억달러(약 8조원) 투자유치엔 업무협약(MOU)에 불과하다거나, 금액이 적다는 비아냥부터 야권에서 나오니 세금이 아까운 일이다. 북핵과 중국의 갑질에 관대한 당 지도부가 이번 방미를 "퍼주기 외교", "국권 포기"로 규정하는 것도 같은 틀에서 읽히게 될 수 있다.

주어와 더불어 '주체'란 측면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28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미정상회담을 두고 "아낌없이 퍼주는 글로벌 호갱 외교라는 참으로 굴욕적인 상황"이라고 했다. 한일관계에 거듭하던 "굴욕"이란 말을 동맹외교에도 꺼냈다. 미 IRA와 칩스법에 관해 실질적 조치를 지켜봐야 할 단계에서 "우리 산업과 기업을 전혀 지켜내지 못했다"거나, "(도청 의혹에) 아예 면죄부를 줬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대만 문제에도 매우 큰 불신을 남겼다"고, 러시아·중국이 '주어'인 듯한 주장도 폈다.

2019년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한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 결렬 7달 만임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3차 미북회담 기대를 내비쳤다. 특히 "북한에 대해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재확인했다고 청와대가 홍보했다. 북한의 한국 핵공격시 미국의 핵 포함 총동원을 문서화한 '워싱턴 선언'과는 딴판이다. 이런 결과를 얻으려 미국 무기 수입, 한국 자동차업계의 미 자율주행기업 합작 투자,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11조원(18년간) 추가수입 보따리를 풀었다. "호갱 외교" '주체'는 누군가.

한편 여권에선 국정의 '주체'를 되돌아봐야 할 일이다. 윤 대통령의 주요 일정마다 영부인 단독 행보가 일일이 뉴스화하고 있다. 의전·외교안보 인사 관련 구설도 있었다. 넷플릭스의 K콘텐츠 투자 배경에 김건희 여사 이름이 나오고, 윤 대통령이 쓴 백악관 방명록에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를 나란히 적는다든지. 2017년 7월 방미, 백악관 방문 때 문 전 대통령이 방명록에 '대한미국'이라고 오기하는 해프닝은 있었어도 김정숙 여사가 함께 적진 않았다. 민주당의 '대통령 배우자법' 추진에도 여권 핵심의 반발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대통령 가족에 불과한 배우자 단독행보 과시가 집중될 때 범보수 지지층이 호응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제2부속실만 폐지했지, 자숙 약속은 식언하고 종횡무진이 계속되면 박한 평가 역시 그럴 것이다. 국정농단 프레임으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된 게 불과 6년 전이고, 유권자들은 '선출된 권력 단 1명'의 행보만을 눈으로 좇기에도 삶이 바쁘다. 한 중앙정치권 경험자는 진보 유권자들은 나의 문제를 대신 해결할 지도자를 원하고, 보수 유권자들은 스스로가 존경하거나 자랑할 만한 지도자인지를 보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지지율과 총선승리가 급한 쪽은 국민 상식선부터 좇아야 할 것이다.한기호기자 hkh89@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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