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만평 숲과 더불어 사는 삶

박경은 기자 2023. 4. 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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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 산속 밭 7만평 일군 산방환담 대표 조순정씨

강원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 산길이 시작되는 입구에 자리 잡은 작은 집 앞으로 다가서자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반색을 한다. “아이고, 빨리 오셨네요. 잠시 앉아 계세요.”

길쭉한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소박한 실내는 구수한 나무 냄새, 향긋한 풀 냄새로 가득했다. 오른쪽 주방 싱크대 위에 놓인 넓적한 바구니에는 각종 나물과 버섯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5분쯤 지났을까. 그는 손에 나뭇가지를 한 움큼 쥐고 들어오며 “닭백숙 삶을 때 벌나무와 마가목을 같이 넣으면 좋다”고 말했다. 밥을 안친 그를 따라 산 구경에 나섰다. 이곳은 화천의 명물이 된 ‘산방환담’이다. 집 앞에 세워진 ‘산방환담’이라는 간판을 시작으로 23만여㎡(7만여평)의 산밭이 이어진다. 대표인 조순정씨(64)가 18년째 가꾸고 있는 산밭이자 산속 농장이다.

그를 따라 오른 산길은 여느 등산로와 다름없어 보였다. 언뜻 보기엔 높이 솟은 나무 아래로 풀이 무성하게 펼쳐져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르다. 길가에 심겨진 것, 계곡변에 늘어선 것, 나무 그늘 아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저마다 균형을 이루며 통일감 있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곰취, 산마늘, 병풍취, 누리대, 작약, 눈개승마, 전호, 잔대, 참취, 두릅, 당귀, 원추리, 엄나무….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든 작물들의 이름을 그는 하나하나 불러가며 특징을 알려줬다.

“눈개승마는 뿌리가 강력해서 이런 절개지에 주로 심어요. 떠내려가는 땅을 잡아 주거든요. 전호는 쌉쌀한 맛이 나는데 폐에 좋답니다. 누리대랑 병풍취는 손발이 찰 때 먹으면 좋지요. 특히나 힘쓰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나게 해줍니다. 예전엔 큰 농사일을 할 때 누리대랑 병풍취를 함께 많이 먹었어요.”

산방환담 숲속 밭. 언뜻 보면 나무 사이에 풀이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한수빈 기자

그는 몇몇 작물의 잎을 따서 맛을 보라며 건네줬다. 쌉쌀하고 아릿한 향, 살짝 들큼한 맛, 온갖 상큼한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나무가 우겨져 그늘이 생긴 아래로는 곰취가 자라는 밭이 이어졌다. 산을 계속 오르자 한편의 다래 덩굴 아래에도 곰취밭이 넓게 펼쳐졌다. “나무가 그늘진 아래에 곰취를 많이 심었어요. 곰취는 그늘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거든요. 다래나무 아래 심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다래 잎이 커질 때가 곰취가 가장 맛있고 따기 좋은 때지요.”

이리저리 산길을 돌던 그는 삐죽삐죽 나온 두릅을 보며 혀를 찼다. 시중에서 파는 것에 비해 가느다랗고 연약한 모양새를 보며 그는 “올해 이른 더위가 찾아와서 두릅이 채 여물지 못한 상태로 빨리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돌배나무가 심겨진 밭으로 안내했다. 돌배가 어떤 맛일지 궁금한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그는 “새콤달콤하고 진한 맛이 난다”면서 “돌배주나 청을 많이 만들어 먹는다”고 설명했다.

“이 나무 심고 나서 처음 열매를 맺는 데 8년 가까이 걸렸어요. 비료나 농약을 쓰면 열매가 빨리 열렸겠지만 스스로 이겨내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렸지요. 10년차 되어서는 정말 달고 탐스러운 열매가 많이 열렸습니다. 많을 때는 열매를 2t가량 수확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올해처럼 꽃샘추위가 심하면 열매를 잘 못 맺으니 좀 걱정이긴 합니다.”

조순정 산방화담 대표는 “사람과 나무, 식물, 벌레가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숲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한수빈 기자
곰취, 병풍취, 눈개승마...18년째 더불어 사는 농법으로 작물 70여종 가꿔

농약이나 화학 비료, 비닐하우스 등 인위적인 다른 방법 대신 온전히 자연과 환경에 의존하는 농법을 고수한 지 올해로 18년째다. 참나무 껍질 등 유기물을 자연 퇴비로 삼았고 서로 ‘궁합’이 맞는 작물들을 연구해 꼼꼼히 심었다. 그늘에는 곰취를, 바람이 잘 드는 곳에는 산양삼을, 마가목 아래에는 병풍취와 누리대를 심는 식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푸석하던 땅은 이제 촉촉한 찰기를 머금은 곳으로 변했다. 이곳에서 자라는 작물만 70여종. 대량 농산물 재배에 주로 사용하는 F1 종자가 아닌 토종 종자만을 고집해 가꿨다. “환원농법이라고도 하고 자연농법이라고도 하는데 저는 더불어 사는 농법이라고 하고 싶어요. 복잡할 거 없이 자연 그대로 원래 작물들이 살던 대로 자라게 해주자는 게 핵심이지요.”

다래덩쿨 아래 곰취밭이 펼쳐져 있다. 한수빈 기자

‘도회지’ 출신인 그는 1979년 결혼하면서 화천으로 들어왔다. 평범하게 아이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남다른 ‘시골 아낙’이었다. 고된 농사일과 살림, 시집살이에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그의 비법은 책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책 살 돈이 없으면 버스를 타고 나가 서점에서 책을 보고 오기도 했다. 박경리, 박완서, 펄 벅의 소설부터 보부아르의 책까지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삶의 가치에 대해 일깨워 준 헬렌 니어링의 책은 그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와 고민의 근원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더라고요. 어떻게 함께 사느냐는 거죠. 사람뿐 아니라 자연과도 마찬가지고요. 도시보다 농촌의 환경이 더 오염됐다고도 하잖아요. 더 빨리, 더 많이 욕심내고 당장의 수익만을 좇다 보니 결국 다 무너지고 피폐해지는 거죠. 시골에서 파는 지역 농산물이라고 샀는데 그게 서울 경동시장에서 사 오거나 중국산이 상당수라는 게 너무 충격적이지 않나요.”

조순정 대표가 산남눌 초절임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더불어 사는 농법. 자녀들이 어느 정도 독립한 뒤 그는 결심을 굳혔다. 꿈꾸던 공간을 산속에서 일궈보기로 했다. 2005년 그는 나름 동네 노른자위에 있던 논밭 5000평을 팔고 버려져 있다시피 한 산속 2만8000평의 땅을 사들였다. 무모해 보이는 그의 도전에 남편 윤병옥씨는 “당시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고 했다.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농사를 포기하고 ‘엉뚱한’ 일에 나선 그를 향해 ‘미친년’이라는 수군거림도 있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별 소득 없는 몇년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책을 찾으며 연구에 매달렸고 농업 관련 교육 프로그램이 있으면 어디든 열심히 쫓아다녔다. 다행히 농업 마이스터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도 생겼다. 산농사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자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틈틈이 인근의 땅을 추가로 샀다. 생협을 통해 모둠쌈을 판매했고 단체관광객을 대상으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함께 산밭을 둘러보며 나물을 캐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충만한 숲의 기운을 받아 가는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온전한 힐링을 체험해 본 참가자 중 때가 되면 찾아오는 이들도 꽤 많아졌다. ‘산방환담’이라는 이름처럼 산속에서 나눈 정답고 반가운 이야기의 추억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방환담 입구에는 텐트를 치고 캠핑할 수 있는 덱도 마련되어 있다. 그는 또 자신이 갖고 있던 책과 기증받은 책을 모아 산속에 자그마한 도서관도 꾸몄다.

산밭 둘러보며 나물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꽃... 입소문 타며 지역 명물로

그와 함께 ‘등산’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자 감칠맛 나고 구수한 밥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말린 곰취를 넣어 지은 곰취밥, 벌나무와 마가목, 표고버섯을 넣어 푹 끓인 토종닭백숙, 쌈채와 초절임한 산나물이 식탁 한가득이다. 명이와 곰취, 눈개승마, 당귀, 전호, 잔대를 그가 만든 특제 소스에 버무려 낸 산채 초절임은 밥 한 그릇 뚝딱 비울 만한 밥도둑이다. 간장과 식초 외에 다래와 돌배, 개복숭아로 만든 효소가 들어간 것이 비법이다. 쌀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재료가 산방환담 농장에서 나온 것들이다. 7만평 숲이 차려낸 밥상인 셈이다.

조순정씨의 숲에서 나온 작물로 차린 밥상 조순정씨 제공

그동안 묵묵히 산을 일궈온 그의 요즘 고민은 건강한 수익구조를 만들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이어가는 것이다. 마을이, 다음 세대가 함께하지 않으면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다행히 아들 세종씨가 엄마의 뜻을 이어갈 뜻을 비치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화천의 식재료 조리법 개발 및 청년 창업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화천힐링센터도 조 대표의 고민에 동참했다. 산방환담에서 많이 나는 곰취로 김치를 담그고 병풍취를 이용해 시리얼을 만드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고 있다. 오는 5월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산방환담 일대에서 열리는 ‘산방환담 봄나물 마중축제’도 그 일환이다. 산방환담과 화천힐링센터, 지역 청년회 등이 함께하는 이 축제에서는 산나물 한상차림, 산나물 샌드위치, 산나물 디저트, 산나물 음료를 맛볼 수 있다. 화천힐링센터에서 창업 교육을 받은 젊은 셰프들이 메뉴 개발에 참여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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