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대책 후폭풍, 피해자들 “이럴 거면 차라리 폐기하라”
피해자들 “피해자 걸러내는 특별법”
경매 우선매수권 주고 임대 가능토록…
원희룡 “보증금은 사인 간 채권·채무관계”
6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지원해주겠다는 정부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방안에 불만과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요건 중 모호한 부분이 있고, 요건에 충족되지 않는 피해자는 사각지대로 몰린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이럴 거면 차라리 대책을 폐기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전세세입자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만큼 정부와 피해자 간 갈등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으리란 분석이 나온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는 28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세사기특별법을 차라리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마이크를 잡은 안상미 위원장은 “전날 나온 지원방안을 보면 ‘어떻게 하면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고민한 것 같다”며 “이럴 거면 그냥 하지 말라”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저희가 (매물에 대한) 경매 중지를 외친 건 일단 (경매를) 멈춘 다음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며 “(지원책이) 하나가 나오더라도 제대로 된 게 나와서 피해자들이 이를 통해 숨을 쉴 수 있게끔 해달라. 같이 논의하자”고 했다.
이날 회의엔 정부가 전날 발표한 ‘6가지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참여해 목소리를 보탰다. 정부가 정한 특별법 지원대상 요건은 △대항력을 갖추고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 △임차주택에 대한 경·공매(집행권원 포함)가 진행 △면적·보증금 등을 고려한 서민 임차주택 △수사개시 등 전세사기 의도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 △보증금의 상당액이 미반환될 우려가 있는 경우 6가지다.
2021년 8월 서울 종로구에 1억2000만원짜리 오피스텔 전세를 구한 A씨도 마찬가지다. A씨는 △대항력을 갖추고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 △임차주택에 대한 경·공매(집행권원 포함)가 진행 등에 해당되지 않는다.
A씨는 잔금을 치르고 이사하는 날에서야 본인이 계약한 집에 예전 임차인이 대항력을 갖춘 채 살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집주인이 예전 임차인에게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A씨는 “순식간에 이삿짐을 들고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됐다”며 “이후 전재산과 다름없는 보증금을 잃고 고시원 등을 전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A씨는 “지난 3월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를 찾아가 다른 건 모르겠고 8월에 전세대출을 갚아야 하니 금융지원이 되는지 물어봤지만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상환해야 하는 전세대출금을 좀 천천히 갚게 해달라는 것뿐인데, 저는 특별법 조건 첫 번째에서부터 걸린다”고 호소했다.
정부는 전날 피해자에게 경매 우선매수권을 부여하겠다며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한 6가지 요건을 제시했다. 정부 입장에선 경매시장에 개입하는 것이다 보니 피해자 기준을 엄격하게 정한 것이지만 요건 해석상 모호한 부분이 있고, 6가지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 피해자는 배제되는 식이다보니 반발이 크다.
우선, ‘다수 피해’, ‘보증금 상당액 미반환’, ‘전세사기 의도’는 주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전세사기’로 통칭되고 있는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태엔 깡통전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세입자에게 깡통전세를 준 집주인에게 사기의 의도가 있었는지 등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은 상태다. 정부는 예측하지 못하는 피해 유형이 나와도 가급적 넓게 피해자로 인정해 구제하겠다는 방침이지만, 피해 인정 과정에서 혼란이 불가피한 셈이다.
6가지 요건을 다 충족할 수 없는 피해자가 많은만큼 새로운 문제가 빚어질 수 있다. A씨 사례처럼 이중계약으로 아예 경·공매 절차를 밟을 수 없는 피해자도 있고, 진씨처럼 수사가 진행되지 않아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이도 있다. 위원회는 “정부·여당이 발표한 특별법안은 지원 대상이 협소하다”며 “6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피해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고 했다.
◆“조세채권 안분에서 당해세는 제외…말이 되나”
‘조세채권 안분’에서 당해세는 제외된 점, 특별법 기간이 2년으로 한정된 점 등도 문제로 지적됐다.
정부는 전날 임대인의 세금 체납액이 많아 경·공매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전체 세금 체납액을 임대인 보유 주택별로 나눠 경매에 부치는 ‘조세채권 안분’을 시행하겠다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민생경제위원장 이강훈 변호사는 이에 대해 “어제 밤에 법안을 보다 보니 안분을 해주겠다는 건 ‘기망’”이라며 “세금 중 가장 중요한 게 당해세인데, 당해세에 대한 건 안 하겠다고 법에 명시가 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선순위 국세 대부분이 당해세인 종부세인데 그걸 빼면 이 사태가 어떻게 해결되느냐”며 “발표할 땐 안분하겠다고 하고 실제 법안엔 종부세를 빼놓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라고 말했다.
특별법 기한이 시행 후 2년인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피해자 진씨는 “피해자가 증거를 모으기 위해 생계도 중단하고 임대인의 재산을 직접 추적해야 하느냐”며 “그걸 2년 안에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정부가 전날 발표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안 핵심은 6개 요건을 충족한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경매 시 우선매수권을 주고, 이를 포기할 시 임대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정부는 우선매수권을 가진 피해자들에게 저리로 낙찰자금 대출을 지원한다. 디딤돌대출에 전용상품을 만들어 연 금리 1.85∼2.70%에 최대 4억원까지 대출해준다.
피해자가 여력이 부족하거나 해당 주택 매수 의지가 없어 우선매수권을 포기한다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임차인으로부터 우선매수권을 넘겨받는다. LH는 해당 주택을 매입한 뒤 매입임대주택으로 피해자에게 임대한다. 전세사기 피해자에게는 소득·자산요건과 관계없이 매입임대주택 입주 자격을 부여한다. LH 매입임대는 2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 최대 20년까지 거주할 수 있으며, 임대료는 시세의 30∼50% 수준이다.
원희룡 국토부장관은 전날 ‘선별적 구제에 초점을 맞춘 것 아니냐’는 질문에 “보증금은 기본적으로 사인 간의 채권·채무 관계”라며 “원칙적으로 전세사기라는 매우 예외적인 대상에 대해서만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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