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6.산에서 어명을 받은 소나무들
■삼척 준경묘역은 명품 소나무 전시장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역
국보 1호 숭례문 복원 소나무 벌채
“어명(御命)이요.”
수도 서울 한가운데 대한민국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불에 타 전소된 지난 2008년 12월 10일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역의 산에서 한 목수가 도끼로 큰 소나무 밑동을 찍으면서 “어명이요”라는 말을 세 번 외쳤다.
이날 목수가 베어 넘긴 소나무는 서울 도성의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국산 토종 금강소나무였다.
앞서 그해 2월 숭례문이 불에 타는 사상 최악의 변고를 당하자, 문화재청은 전국을 돌며 숭례문 복원에 사용할 소나무를 수소문하고 찾아 다니다가 이곳 준경묘역 주변에서 20그루를 벌채해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각각 10그루씩 사용키로 하고, 그해 12월 벌채작업을 진행했다.
준경묘는 500년 조선 왕조 창업 스토리를 품고 있는 길지(吉地)이니 숭례문 복원을 위한 소나무 공급처로는 역사적 인연도 안성맞춤이었다.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祖)인 ‘양무장군(陽武將軍)’이 묻혀있는 묘소로, 인근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는 양무장군 부인의 묘, 영경묘(永慶墓)와 함께 조선 왕조 창업의 국운을 꽃 피운 천하의 명당으로 꼽힌다.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한 도인의 말을 듣고 이곳에 선친(양무장군)을 안장함으로써 후일 태조가 탄생하고, 조선을 건국했다는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부친상을 당한 목조에게 도인은 “천하의 명당인 이곳에 묘를 쓰면서 소 100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황금관을 쓰면 머지않은 후대에 반드시 왕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 소 100마리와 황금관을 구할 방도가 없었던 목조는 소 백(百)마리는 흰백(白)에 한일(一)자를 더해 해결한다는 뜻에서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황금색의 귀리 짚으로 대신해 장사를 지냄으로써 도인의 말을 이행했고, 이후 4대 뒤에 조선이 개국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정이품송과 혼례 치른 ‘미인송’ 존재도 각별
‘어명이요’ 세번 외친 뒤 벌채
큰 나무에 대한 경외 사상 깃들어 있어
우리나라 등산은 솔향과 함께하는 힐링 여정이다. 우리 산에서 가장 많은 나무가 소나무이니 솔향은 곧 우리 산의 향기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데 산에서 정말 좋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스스로 수백년 풍상을 이겨내고 커야 거목이 될 수 있으니 그런 소나무가 흔할 리가 없다.
그런데 준경묘는 주변 산 전체가 명품 소나무 전시장이다. 120만평 산림에 어른 두 팔로 안아도 반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는 아름드리 토종 금강송 거목들이 즐비하다. 충북 보은 속리산 입구의 정이품송과 혼례를 올린 것으로 유명한 ‘미인송’도 이곳 준경묘역에 있다.조선 세조대왕에 의해 정이품 품계를 받은 정이품송이 수세가 약해지자 혈통 보전을 위해 준경묘의 미인송 암술에 정이품송의 꽃가루를 찍어 바르는 혼례 의식을 치른 것이다. 지난 2001년에 치러진 혼례는 당시 신준우 산림청장이 주례를, 김일동 삼척시장과 김종철 보은군수가 각각 혼주를 맡아 실제 사람의 혼례처럼 행해져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곳 준경묘의 소나무를 숭례문 복원의 중요 목재로 활용키로 한 문화재청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준경묘 봉향회 등 종친과 산림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의례와 격식에 따라 소나무 벌채에 들어갔다.
벌채 당일 준경묘에서는 옛 격식을 본받아 어명에 의해 소나무를 벤다는 고유제를 지내고, 벌채 대상목 옆 나무에 북어와 창호지를 실타래로 묶는 소매지기, 벌채목 밑동의 껍질을 벗기는 근부박피, 검인 도장 낙인 등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 이후에 대목수가 도끼질하는 본격적인 벌채작업이 진행됐다.
대목수 한사람이 벌채할 소나무 밑동을 도끼로 세 번 내려치면서 “어명이요”라고 크게 소리치는 것은 큰 나무를 벨 때의 전통적인 의례인데, 그 연유를 들여다보면, 삼가고 조심하는 조상들의 지혜와 자연에 대한 경외의식이 깃들어 있다.
당시 현장에 있는 대목수들은 그 이유에 대해 “100년 이상을 산 소나무는 영물로 보기 때문에 나무를 베는 것을 목수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꺼리게 되므로 임금의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베게 됐다는 것을 알리는 차원에서 어명(御命)이라는 것을 강조해 외친다”고 설명했다. 큰 나무를 베어 넘기면서 내 뜻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이라는 것을 밝혀 도끼질을 한 본인에게 일종의 ‘동티’ 피해가 오는 것을 막는 주술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식을 통해 목수들은 나무를 베도 이제 괜찮다는 일종의 심리적 위안으로 삼고, 생명이 있는 나무에 대해 사죄의 마음을 전하는 경외감까지 가다듬게 된다면 이해가 쉬울까.
세 번 도끼질이 끝나면 톱을 든 목수가 나서는데, 톱을 들고 나무를 베어 넘기는 목수야말로 정말 기가 센 사람이라고 한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가 “이 큰 나무를 어떻게 베어 넘기나”하는 식으로 처음부터 주눅이 들어 버리면 산판의 큰 벌목행사, 특히 궁궐용 목재 벌채는 진행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정말 기가 센 목수가 톱을 들고 큰 나무를 완전히 제압해 베어 넘기는 방식으로 벌목이 이뤄지는 것이다.
준경묘 벌채 이후 5년 복원 과정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 숭례문은 준경묘의 금강송 덕분에 다시 옛 모습을 살려 복원될 수 있었다.
■강릉, 삼척, 양양, 경북 울진 등 국내 최대 금강송 산지
‘황장목(黃腸木)’의 고장, 명성 자자
강릉 성산면 ‘어명정(御命亭)’ 등산로는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
금강송 최대 적은 ‘산불’
삼척과 강릉, 양양, 경북 울진 등 동해안은 금강송 산지로 유명하다. 송진이 가득 차 비를 맞아도 썩지 않고, 단단하기가 비할 데 없어 절대 부러지지 않는 최고의 목재다. 조선시대에는 누런 속살을 창자에 비유해 ‘황장목(黃腸木)’이라 불렀고, 금표(禁標)를 세워 함부로 베는 것을 막았다.
금강소나무의 고장인 이 지역의 산을 등산하다 보면 이렇게 ‘어명(御命)’에 의해 잘려나간 큰 소나무 흔적을 가끔 발견하게 된다. 이 고장이 예전에는 궁궐에서 사용할 목재를 얻기 위해 입산과 벌채를 금하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많았던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강릉의 ‘대공산성’ 등산 코스를 한 바퀴 돌면서 만나게 되는 성산면의 ‘어명정(御命亭)’은 이름 자체에 ‘어명’이 들어있어 더욱 이채롭다. 어명정은 지난 2007년에 광화문 복원에 사용할 금강송을 베어낸 자리에 세운 정자인데,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당시 잘려나간 거대한 금강송 그루터기를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이채롭다.
아름드리 금강송 3그루를 벤 2007년 당시 어명정의 벌목 행사 또한 임금의 명에 의해 벌목한다는 교지를 전하고, 산림청장과 문화재청장이 직접 제례를 올린 뒤에 “어명이요”를 세 번 외치고 이뤄졌다. 강릉이 자랑하는 걷기 길 명소인 이 구간 등산로는 이후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로 이름 지어졌다.
소나무를 베어 낸 주변에는 어린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는 우리 산에 없어서는 안 될 각별하고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다. 봄철 건조기만 되면 전국 각지에서 산불이 끊이지 않는 지금, 금강송의 최대 적은 산불이다. 죽어서도 전통 건축물의 핵심 목재로 천년을 다시 사는 금강송이 부디 고이 보존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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