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지뢰밭’ 가상자산시장,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우리 가상자산거래소는 무엇보다 안정성이 뛰어납니다. 혹시 있을 수 있는 사고에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최근 만난 가상자산거래소 부대표 A씨의 말이다. 당시 세계 3위 거래소 FTX가 장부 조작 등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져 가상자산거래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A씨는 가상자산업계가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신뢰 회복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그가 운영 중인 거래소는 안전한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FTX는 무너지기 전만 하더라도 거래소 중 가장 건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거래소는 안전에 특화됐다며 기술적인 측면에서 봐도 다른 어떤 거래소보다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A씨와의 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해 조율하고 있던 찰나, A씨가 운영 중인 거래소 자금 중 상당수가 해킹으로 탈취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만일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인터뷰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대체 이 업계는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의심해야 하는가. 문득 가상자산업계는 ‘지뢰밭’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디에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 말이다.
가상자산업계 사람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늘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특히 가상자산업계는 다루는 용어도 어려울 뿐 아니라 외국에서 차용한 단어가 많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들이 하는 말에 현혹되기 쉽다. 또한 가상자산과 관련한 제대로 된 법이 없어 편법과 합법을 넘나들기에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심심찮게 들었다.
가상자산에 알맞은 법체계가 없다 보니 취재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자주 보게 된다. 현행 제도상 가상자산거래소는 카지노, 도박과 같은 유흥업으로 분류돼 있다. 그러나 지난 대선 때 모든 후보는 가상자산 산업 진흥을 위해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바꿔서 말하자면 한 나라를 이끌 사람이 자국민에게 ‘도박’을 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만약 그들이 가상자산 산업이 도박업과 다르다고 생각했다면 유흥업에서 해지하는 방안을 검토야 했으나 지금은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간 상태다.
국회에서 가상자산 기본법과 관련해 많은 논의가 오갔으나 실질적인 결과물은 없는 상태다. 지난해 천문학적인 피해를 일으킨 ‘루나 폭락’ 사태가 터졌을 때만 하더라도 정치권은 국정감사로 루나 관련 인사들을 증인으로 채택하기도 했으나 결국 ‘맹탕’ 국감으로 끝났다. 특히 일부 정치인은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 ‘거래소의 지배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공수표만 날리다가 국감 시즌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가상자산으로 인한 투자자의 피해는 계속 커지고 있다. 코인을 이용한 다단계 사기, 조직적인 시세 조종으로 인한 피해 등 주식시장이었으면 엄중하게 처벌됐을 범죄 행위도 이곳에선 법이 없다는 이유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가상자산 전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가상자산 해킹으로 탈취된 금액은 약 5조원이다. 단순히 법이 없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그 피해 규모가 막대하다.
도대체 그 기본법은 언제 통과되는 것인지 정치권과 가상자산업계 관계자에게 물어봐도 기약 없는 약속만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한 정무위 관계자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해도 반대 쪽이 정치적인 싸움으로 끌고 가려고 해 매번 도돌이표처럼 논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유럽연합(EU)이 최근 가상자산 규제 법안 미카(MiCA)를 통과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국내 역시 지난 25일 국회 정무위원회가 가상자산 관련 기본법 도입을 위해 논의를 재개한 점도 긍정적이다. 수많은 피해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지뢰밭 같은 시장을 방치하는 것은 ‘직무 유기’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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